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5

포토 에세이 통산 1004호(2020.6.15)

이득수 승인 2020.06.14 12:45 | 최종 수정 2020.06.14 13:01 의견 0
바다처럼 푸른 하늘
바다처럼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

어제 여든 셋의 장모님이 오셔서 45년간의 장서(장모사위)간답게 거실에서 같이 잤습니다, 저는 동쪽 방구석에 자고  장모님은 남쪽 파우치에 누웠지만 밤에 두어 번 잠이 깨어 화장실을 가려다 장모님 신경쓸까봐 참고 잤습니다.

아침이 되자 온몸이 찌뿌둥하며 기분이 트릿했습니다. 정형외과에 치료 중인 어깨통증도 더 극성을 부리고... 이럴 때 혼자 잘 넘겨야지 아내에게 말하면 괜히 부부가 동시에 우울(憂鬱)의 바다에 빠지는지라 서재에 클래식음악을 켜놓고 두 시간을 가면상태에서 헤매는데
“당신 왜 그래요? 컨디션이 안 좋아요?”
진작 눈치를 챈 아내에게
“괜찮아. 장모님 모르게 해.”
하고 식탁에 앉았지만 암환자가 컨디션이 안 좋아지면 그렇듯 식욕이 나지 않고 밥그릇을 보자마자 진땀이 났습니다. 억지로 반 그릇쯤 물에 말아서 먹고 약까지 먹은 후 다시 서재 가득 행진곡을 채웠습니다. 괜히 우울할 때 가장 효율적인 두 방법이 산책과 음악감상인데 50대 후반에 클래식을 배운 저는 그래도 참으로 다행인 셈입니다.

열시 반쯤 일어나 아내의 자동차로 장모님을 이웃마을 89세 처이모님(우리장모님보다 훨씬 건강하고 정신이 맑음) 댁에 데려다 주고 혼자 2Km쯤 되는 거리를 행진곡을 들으며, 휘파람을 불며 악으로 걸어가니 마침내 파란 하늘과 싱그러운 6월의 바람이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물리치료를 마치고 나니 아내가 도착해 단골식당에서 들깨칼국수를 모처럼 국물까지 다 먹고 돌아와 다시 서재에 클래식을 채우고 오후 네 시까지 비몽사몽간을 헤매니 마침내 컨디션이 좀 돌아왔습니다. 떠먹는 요구르트와 바나나 하나를 간식으로 먹고 마루로 나가니 기다리던 마초가 앞발을 쭉 뻗어 준비운동을 하는 것이 오래 기다린 모양이었습니다.

제가 스틱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마초가 칼치못과 바들들을 건너 후리마을로 길을 잡았습니다. 오랜만에 향교마을 뒤를 돌아 '밤갓'을 지나 골안못을 향하기로 한 것입니다.   

후리마을 골목어귀에 마침 여섯 포기의 빗자루대가 마치 초록색풍선처럼 길쭉하고 동그랗게 자라서 오래 기다린 저를 태워 금방이라도 소아시아 아나톨리아고원을 돌아 파묵깔레로 향할 것 같은 자세라 금방 기분이 좋아지며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자 제 마음은 벌써 흑해와 동유럽을 지나 반 고흐가 우울한 말년을 보낸 '아를'이란 남부프랑스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초록색 비행선 빗자루대
초록색 비행선 빗자루대

또 한참 마을뒷길 산기슭을 올라가는데
“안녕!”
이번에는 묵정밭의 울타리그물에 매달린 토끼인형이 인사를 했습니다. 제가 귀촌하기도 훨씬 더 전에 저처럼 어느 꿈 많은 공상가가 귀촌해 묵어버린 옛 향교터를 개간하러 울타리를 치고 수로를 뚫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만 지치거나 병이 났는지 울타리에 토끼인형을 매달고 밭둑에 오벨리스크(전승기념탑)같은 사각형기둥 하나를 세우고 철수한 모양입니다. 그렇게 남겨진 토끼인형은 또 한 명의 공상가 저만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시원한 아카시아 그늘로 접어드는데 푸드득, 화려한 날개의 장끼 한 마리가 튀어 오르자 회갈색 우중충한 까투리 한 마리가 한 20여 마리의 병아리를 36방향으로 흩으며 도망을 치는지라
“안 돼!”
아직도 맹수의 본능이 남은 마초를 한참이나 붙잡고 늘어지다 별로 다니는 사람이 없어 '제1 마초고개'라 이름 지은 '밤갓'과 골안못 사이 고개를 넘어 골안못 산책로에 도착해 오뉴월 수캐처럼 헐떡거리는 마초에게 
“여기 앉아!”
하며 호주머니의 간식과자를 꺼내주니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

며칠 전 비가 온 데다 오전에 바람이 불었는지 마치 원님이 부임하는 동헌의 마당을 쓸듯 깨끗한 길바닥 아카시아 그늘에 앉아 윗 통과 신발, 양말까지 벗고 너부죽하게 누우니 싱그러운 아카시아와 떡갈나무 잎 사이로 너무나 눈부시게 푸르른 6월의 하늘이 다가왔습니다. 얼른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한 줄기의 하얀 구름과 소나무가지 사이에 아주 눈이 밝은 사람이나 발견할 듯 희미한 반달이 한껏 기분을 돋우지만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어 누운 채로 또 한 장의 하늘 사진을 찍으니  하얀 구름 사이로 풋풋한 바람 냄새와 열일곱 적의 휘파람 소리가 다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쌍갈래머리 소녀 하나도 기억 속의 고개를 넘어가고...

오늘은 1년에 겨우 몇 번이나 볼 푸른 하늘, 하얀 구름 사이로 사이다 냄새가 풍길 것 같은 하늘입니다. 그 코발트색 천공(天空)을 한참 바라보니 마침내 하늘이 진짜 바다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바다로 보였습니다.

가장 트릿한 상태로 일어나 가장 상쾌한 기분으로 저무는 오늘은 정말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입니다. 미당 서정주의 시처럼 봄이 또 와도 좋고 눈이 또 와도 좋은 그런 날인 것입니다.
 <시인·소설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