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平里) 선생의 명촌리 일기 (33)덩굴찔레꽃, 지독한 사랑

이득수 승인 2020.06.08 17:41 | 최종 수정 2020.06.08 18:02 의견 0
골안못 콘크리트 산책로를 기어가는 덩굴찔레꽃

지금껏 몇 회 동안 주로 희고 눈부신 찔레, 그립고 안타깝고 서러운 내 고향, 모두가 널리 아는 찔레꽃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젠 여태껏 우리가 만난 찔레와 살아가는 방법이나 그 모습이 전연 다른 '덩굴찔레꽃'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보통 태양을 향하는 향일성(向日性)이 있어 지면에서 직각으로 우듬지를 세우고 가지를 뻗습니다. 그러나 옆으로 기어가는 포복성(匍匐性)의 특징을 가진 칡 같은 덩굴나무도 있습니다. 그 대표 격인 칡은 무엇이든 제 촉수에 닿으면 감고 올라가 널찍한 잎으로 태양을 흡수해 자신을 지탱해주는 나무들이 고사시키고 마는 생태계의 폭군입니다. 맛과 영양은 물로 약리 성분까지 듬뿍 들어있는 칡뿌리로 우리는 칡국수로, 칡즙을 즐기지만 사실 수많은 나무들이 희생물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덩굴찔레꽃은 칡에 비해 곁순이 거의 없이 한 줄로 길게 뻗다 앞에 나무 같은 높은 장애물이 있으면 옆으로 돌아가고 웅덩이처럼 패인자리가 있으면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며 전진을 멈추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키작은 나무를 감고 올라가 질식시키는 일은 없습니다. 마치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지나간 길처럼 길고 멀지만 나름 깔끔하고 고독한 여정(旅程)을 즐기는 셈입니다.

강가에 붙은 우리마을 버든은 마구뜰이라는 좁은 들을 건너면 진장이라는 나지막한 야산이 펼쳐지고 그 사이에 몇 개의 골짜기가 있는데 그 진장골짜기 맨 꼭대기 천수답 3마지기가 우리 논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젊은 시절 남의 집살이를 하고 장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산 논, 해방 전후 우리가족의 생명줄이자 도가리가 열셋이나 되는 천수답입니다,

아버지가 천식으로 고생을 하셔서 저는 여남은 살 먹을 때부터 논매기를 해야 되는데 갓 심은 모가 뿌리를 내리고 바로 설(그걸 사람한다고 함. 살음한다라는 뜻 같음)때쯤 아시논을 매고 한 20일이 지나 두 벌 논을 매고 다시 20일이 지난 마지막 망시논을 맵니다. 

한여름에 매는 망시논이야말로 푹푹찌는 태양에 머리가 녹아버릴 것 같고 고온으로 논물이 부글부글 개는 데다 날개가 새파란 쉬파리가 사납게 등을 물어 고통이 엄청났습니다. 얼마나 등이 따가운지 저도 모르게 방금 논을 매던 손으로 등을 긁어 온몸이 뻘투성이가 될 때쯤이면 저보다 일곱 살 많은 셋째 누님이 아침밥을 이고 옵니다.

도랑물에 대충 얼굴과 발을 씻은 저는 논과 붙은 비스듬한 야산 잔디밭에서 따가운 볕을 받으며 아침을 먹는데 반찬이라야 열무김치에 곰피무침, 애호박찌게와 마른멸치와 고추장 정도였고 호박이 없을 때는 보리쌀을 씻은 뜨물에 된장과 멸치 몇 마리를 넣고 끓인 '뜨물장'을 가져와도 한창 때라 그냥 보리밥 고봉 한 그릇을 금방 뚝딱했습니다. 그리고는 누님이 광주리에 식기를 챙기는 사이에 앉은자리에 그래도 벌렁 드러누워 잠시 눈을 부치는데 방금 전까지 논바닥의 진흙과 풀이 잔뜩 끼어있던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로 시원한 바람한 줄기가 통과하는 상쾌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잠깐, 어느새 뒤를 따라온 쉬파리가 등을 물어 누님이 한참동안 파리를 쫓아주어 게슴츠레 눈이 감길 때쯤 이번에는 짧은 바지 속을 침입한 검정개매가 그만...

바람에 찢겨 3개의 꽃잎만 남은 찔레꽃
바람에 찢겨 3, 4개의 꽃잎만 남은 덩굴찔레꽃

그렇게 비스듬히 잔디 위에 누워 자다, 깨기를 반복하는 눈가에는 반드시 다섯 개의 하얀 꽃잎을 매단 덩굴찔레꽃이 기어가며 어떤 놈은 입술에 닿기도 했습니다. 하얀 꽃잎 다섯 개와 한가운데의 노란 꽃술로 이루어진 그 단촐한 꽃은 눈이 부신 순백이기보다는 회칠을 한 벽처럼 좀 무디고 둔한 느낌이었는데 조금만 바람이 불면 꽃잎이 찢어지거나 떨어져 보통 서너 개 또는 단 하나의 찢어진 꽃잎으로 나부끼는 놈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 가장 예민한 제 사춘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해 더 지나 스무 살이 된 저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낯선 항구로 떠났지만 가난한 시골뜨기인 제게 돌아온 것은 학비부족의 휴학과 신춘문예의 낙방, 그리고 가슴 저린 실연(失戀)의 아픔뿐이었습니다. 그 모든 꿈을 다 버리고 입영열차를 탄 초라한 청춘, 제 모습이 마치 꽃잎이 찢어져 너덜거리는 모양만 같았습니가. 그래서 신병(新兵)이 된 저는 휴전선의 달을 보며 얼마나 음울한 울분을 토하고 서러운 젊음을 보냈는지...

객지에서 덧없이 늙어 머리가 반백이 되었을 때 문득 하얀 찔레꽃이 떠오르며 술 때문에 자영이 일찍 죽어 혼자 5남매를 떠맡은 셋째누님의 삶과 버든에서 통도사 앞까지 고개를 넘고 개울을 건너 노란 저고리 팔랑거리며 두 번째 시집을 가 남의 자식 둘까지 6남매를 길러내고 죽은 큰누님도 모두 찔레꽃 같고 화려한 꿈과 청춘을 다 떠나보낸 자신도 하얀 덩굴찔레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삭막한 그리움을 살려 이런 시를 쓰기도 했슴니다.

덩굴찔레꽃(지독한 사랑3)
                            
자갈밭에 움튼 덤불 꾸물댄다며,
그나마도 가시 돋아 성가시다며,
눈 한번 주지 않고 그가 떠나도

나 오래오래 기어왔다네,
그에게 조금씩 다가왔다네,
지나가는 바람에 머리 헹구고
초록치마 빨아 입듯 잎을 피웠네.
아주 작고 성긴 꽃잎 다섯 개
웃음 수줍어 발갛게 옹송그리며 

그래도 그의 체취 저 만큼이네,
쓸쓸한 하늘 끝에 새가 떠나고
목소리는 구름너머 아득하다네.

어제는 꽃잎 하나 엽서를 썼네,
오늘 아침 또 하나 전보를 치고,
저물녘엔 꽃잎 두 장 유서를 썼네,
이제 하나 남은 찢어진 꽃잎
달뜨면 강물 위에 눈물 뿌리리.  

그러고서 20년, 일흔이 된 아침에 하얀 찔레꽃이 생각나니 또 다시 눈가가 젖어오는 것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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