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平里) 선생의 명촌리 일기 (29)찔레꽃이 한 잎 두 잎 물위에 날으면

이득수 승인 2020.05.30 21:33 | 최종 수정 2020.05.30 22:17 의견 0
분홍 찔레꽃
분홍 찔레꽃

그러나 이 애달픈 향수의 노래 〈고향초〉는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모두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라의 위세와 경제가 욱일승천하던 호시절 1989년에 아주 느리고 무겁고 침울한 목소리의 홍민에 의해 애절함을 넘어 너무나 침중하고 서러운 새로운 2절 가사 

찔레꽃이 한 잎 두 잎 물위에 날으면
내 고향에 봄은 가고 서리도 찬데
이 바닥에 정든 사람 어데로 갔나
전해 오는 흙냄새를 잊었단 말인가

를 들고 나와 '무엇이든 뜻하고 노력하면 다 이루어진다던' 한껏 기고만장한 국민들의 마음을 한순간에 다시 눈물 돋게 쓸쓸한 고향마을, 찔레꽃이 물에 흐르는 개울가로 되돌려놓고 만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2절을 개사한 작사가나 가수 홍민은 무슨 마음으로 한창 들뜬 국민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어 다시 그 가난하고 외로운 들길로 이끌었을까요? 이 난감하고 엉뚱한 사태에 대한 정답을 제가 오래 생각해보니 참으로 엉뚱한데서 답이 나왔습니다. 

바로 우리 인간에게는 당면한 현실이 아무리 화려하고 풍족해도 혹시 엄마가 안 보이면 어떡하나, 혹시 아빠가 돌아오지 않거나 저녁밥을 굶게 되면 어쩌나 하는 아무 힘 없이 남의 보호를 받아야 하던 갓난아이 적의 본능적인 불안과 의심이 불씨가 되어 그렇게 편안하고 느긋한 상황에서도 불현듯 '기억의 고집' 또는 '기억의 지속'이라는 고질병(痼疾病)으로 도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밭둑을 기는 찔레꽃. 엷은 분홍분홍색조가 약간 띔띰야
밭둑을 기는 찔레꽃. 엷은 분홍빛이 돎. [사진=이득수]

거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서는 바로 '찔레꽃이 한 잎 두 잎 물위에 날으는' 의 '찔레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우리강산을 해마다 붉게 물들여 아련한 슬픔에 빠지길 좋아하는 민족정서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겨레의 꽃으로 진달래와 찔레, 동백꽃을 꼽았습니다. 

그런데 동백이 한동안 잘 피었다 어느날 문득 마치 사형수의 목이 망나니의 칼날에 떨어지듯 꽃봉오리 전체가 뭉텅뭉텅 떨어져 나가고 진달래 역시 후발주자 철쭉에게 소리 없이 자리를 내어주는데 비해 파랗게 익어가는 보릿고개의 하얀 찔레꽃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 희고 여린 꽃잎 한 두 개가 찢겨 바람에 날아갑니다. 그렇게 하얗게 바랜 꽃잎들이 눈처럼 나부끼다 마침내는 괜히 서러운 눈물방울이 되어 '찔레꽃이 한 잎 두 잎 물위에 나르는' 것처럼 구불텅한 도랑물에 흘러가며 아롱지는 서러움을 사람들은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일찍이 소설가가 되겠다고 결심을 하고 읽고 쓰기에 매진한 세월이 쉰 몇 해가 넘는데 지금도 제 자신이 쓴 시 한 편, 소설 하나가 〈찔레꽃〉이나 〈봄날이 간다〉 같은 대중가요의 가사만큼의 예술성이나 정서적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늘 자책하는 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느 밤 술자리나 별을 보면서 문득 무슨 예시(豫示)처럼 황홀하고 오묘한 시의 구절이나 테마를 떠올렸다고 생각하며 오래 다듬고 숙성시킨 시가 주변의 동료나 친구 이웃들이나 몇몇 좋아할 뿐 어느 평론가나 문학기자는 물론 멀리 떨어져 사는 낯선 사람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찬사를 보내거나 서점에서 팔려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노래방가사집에 나오는 그 많은 대중가요들은 나름대로 한 작사가의 애달픈 정서와 작곡가의 심각한 고뇌에 가수 특유의 음색과 창법이 가미되어 일면식도 없는 '팬'이란 대중들이 한동안 열광했으니 그들의 지지(支持)내지 검증(檢證)을 받은 것입니다. 그에 비해 저의 시는 가장 가까운 제 아내마저 너무 감상적이라고, 수필은 구차하고, 소설을 따분하다고 외면하니까 말입니다.

무너진 담장 가에 핀 찔레꽃
무너진 담장 가에 핀 찔레꽃 [사진=이득수]

세인들이 소위 유행가니 딴따라니 신파조니 하는 그 대중가요 트로트의 가사나 곡조, 피가 끓는 열창을 우리는 다른 어느 분야의 예술에서도 찾기 힘듭니다. 그 대중가요가 얼마나 시민에게 깊이 파고들며 깊은 영향을 주는지 저는 여기서 이은상 작시, 홍난파 작곡, 김자경 노래의 우리나라 대표적 명곡의 하나이자 고유하고 훌륭한 문학 장르 시조(時調) 형태 〈옛 동산에 올라〉의 가사를 들어 〈찔레꽃〉과 비교해 보면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나.

의 노래 한 곡을 듣고 나면 참으로 무게 있고 울림 좋게 잘 짜인 가사에 가히 당대 최고의 작사, 작곡가가 붙고 정통성악을 전공한 가수가 부른 점잖고 운치가 있는 노래임을 느끼기는 하지만 아득한 향수에 젖어 유년(幼年)의 동구(洞口)로 돌아가게 하는 절실함과 애틋함이 없어 누군가의 심금을 울린다고는 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평리(平里) 선생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시정(市井)의 유행가가 아닌 클래식한 가곡(歌曲)에 참여한 명망 있는 시인과 작곡가, 성악가의 권위에는 동의할망정 그 노래를 통하여 쉽사리, 또 절실하고 애틋한 눈물을 흘릴 수 없고 가슴에 고인 서러움을 씻어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한 잎, 두 잎 물위에 떠가는 〈찔레꽃〉이 그렇게도 깊이 우리의 가슴을 적시는 진정한 국민의 꽃이요 노래라는 이야기입니다.

바야흐로 5월 하순, 이 계절의 산기슭과 들길, 도랑가에는 하얀 찔레꽃이 흐벅지게 피고 도록도록 도랑물이 흘러가는 물살위에는 어김없이 바람에 날린 꽃잎이 흘러갈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은 호젓한 시골을 찾아 찔레꽃 그늘에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고 셔츠의 단추도 한 두 개 풀고 느긋이 퍼질고 앉아 국민가요 〈찔레꽃〉을 한 번 불러보지 않겠습니까?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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