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平里) 선생의 명촌리 일기 (32)노란 양지꽃, 누가 금가루를 뿌렸을까?

이득수 승인 2020.06.04 14:39 | 최종 수정 2020.06.04 15:12 의견 0
노란양지꽃이 가득핀 바들못
바들못둑에 흐드러지게 핀 노란 양지꽃. [사진=이득수]

여러분은 우리나라의 시인 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나요? 그리고 누가 가장 멋진 시인이라 생각하나요.

이는 개인적 취향이나 성향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현대시(現代詩)라면 일단 '북(北)에 소월, 남(南)에 영랑'이라는 서정시인 두 김씨(金氏)를 꼽을 수 있습니다.

또 시대와 성향에 따라 

가장 서정적인 천품(天稟)의 시인 정지상
가장 고아(高雅)한 천재 고운 최치원
구도와 지조(志操)의 시인 매월당 김시습
가장 웅혼(雄渾)한 영혼 연암 박지원
가장 애달픈 서정(敍情) 소월 김정식
가장 구성진 시인 미당 서정주
가장 어여쁜 마음 김영랑
가장 투명(透明)한 영혼 윤동주
애련(哀憐, 愛戀)한 로맨티스트 청마 유치환까지

9명쯤 들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럼 그 중에서 누가 가장 뛰어날까요? 이는 좀 잘못된 화두(話頭)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누구인가로 바꾸어야 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정지상을 가장 좋아한답니다. 

정지상(鄭知常)은 고려의 서경(西京), 평양 출신으로 1134년 묘청과 더불어 서경천도를 주장하며 난을 일으키다 어용시인 김부식에게 참살된 것으로 기록된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시인이면서 실패한 정치인의 교과서적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 '남호(南湖)'라는 아호가 있음에도 매우 소탈한 인품이었는지 위의 김영랑, 윤동주와 함께 문인으로서 아호를 쓰거나, 알려지지 않은 보기 드문 경우입니다.

양지꽃

 여러분이나 저 같은 세대는 학창시절에 배운 그의 〈송인(送人)〉이라는 시

雨歇長堤草色多(우헐 장제 초색다)
비 그친 긴 강둑에 풀빛 짙어가는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 남포 동비가)
님 보내는 남포에는 슬픈 노래 흐르는구나.​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 하시진)
대동강 물은 언제나 마를꼬,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 첨록파)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푸른 물에 보태는데...​

하는 애달픈 이별의 정조(情操)가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애련한 정서(情緖)로 가슴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가장 황홀하지만 현실에는 어두운 시인다운 원대한 꿈, 만주땅 글안을 정복하여 발해(渤海)의 꿈을 회복하자는 계획인 서경천도(西京遷都)를 음양가인 괴승 묘청과 모의하여 왕에 건의하다 불발, 반기(叛旗)를 들다 신라의 잔여세력이자 어용(御用)문신이며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사대주의자 김부식에 의해 척살된 불운한 시인입니다. 그래서 젊어 나름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도 복마전 민선시대의 젊은 사무관으로 위정자들에게 속속들이 골병이 든 저는 〈정과정곡(鄭瓜亭曲)〉의 정서와 함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정(二鄭)'의 시(詩)적 스승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오늘 오후 전처럼 무심하게 바들못의 못 둑을 걷는데 노란 양지꽃이 얼마나 눈부시게 피었는지 마치 금가루를 뿌려놓은 아메리카 잉카족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가 다 연상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별 알아주는 이는 없어도 홀로 시골선비임을 자처하는 마초할배는 천재시인 정시상이 5세에 썼다는 

 何人把新筆 하인파신필
 누가 새 붓을 들어 저렇게
 乙字寫江波 을자사강파
 강물에 새 을(乙)자를 새겨 놓았나?

 를 흉내내어 

何人散金粉 하인산금분
누가 저렇게 금가루를 한줌 뿌려 
和氣滿春堤 화기만춘제
둥근 못둑 가득히 봄빛으로 채웠는가?

짧은 절구(絶句) 두 줄을 읊어놓고 영문도 모르는 마초 앞에 어깨를 쫙 폈습니다. 노란 야생화 한 무리에 이렇게 즐거울 수가 있다니, 오늘도 명촌리의 백두옹(白頭翁)은 즐거운 하루를 보낸 것입니다.

 <시인·소설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