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옹(進翁) 시인의 간월산 산책 (32)천전리 용화사(龍華寺)석불
이득수
승인
2020.06.06 19:04 | 최종 수정 2020.06.06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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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 다닌 지 20년이 되는 제 아내 파우스티나는 타종교에 비교적 관대한 편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에 불교도가 흔히 성탄축하케이크를 자르고 캐럴송을 부르듯 부처님 오신 날은 웬만하면 3사(寺)를 순례하며 점심과 저녁을 해결했지요. 올해 '부처님 오신 날'에도 부부동반으로 가까운 천전마을 용화사를 찾기로 했습니다.
근 200년 전에 세워졌다는 용화사자리는 옛날 걸앞(개울앞, 천전) 마을에서 태화강 상류를 건너 언양 장(場)에 가는 마을 어귀랍니다. 거기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농사의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비는 작은 돌부처를 하나 세워 나이든 아낙들은 아침마다 손을 빌며 공을 들이고 싱거운 사내들도 그 앞을 지나다 괜히 미륵불의 코를 한 번 쓰윽 문질러 마치 같은 마을 이웃처럼 친근했답니다.
그런데 해마다 조세(벼)와 군포(병역의무)를 징수하는 아전들이 유독 천전 마을만 이웃 향산이나 명촌마을보다 가혹한 지라 어느 해 마을의 이장격인 풍헌과 상노인 몇이 현으로 찾아가 항의를 하기로
“우리 천전마을에는 양반의 자제들만 번(番)을 서고 이웃 상민들이 그 양반집을 돕는 보(保)로 부담하는 면포가 유독 가혹한 것은 왜 그렇습니까?”
하자 현감이 당장 호방을 데리고 나와 마을 장정을 직접 세는 호구조사를 하다 하나가 모자라자 골목어귀의 미륵불(미륵은 석가모니의 상징으로 법당에 모시는 부처가 아닌 다음 세대의 대중(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언젠가 나타날 것이라 믿는 후세불(後世佛)로 기독교의 메시아(구세주)와 같은 상징임) 을 보고
“이 봐! 여기 또 한 사람이 있잖아?”
반문하면서 무섭게 눈을 부라렸답니다. 그러자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나으리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세금을 깎기는커녕 주리를 틀리거나 박달나무 육모방망이에 매타작을 당한 것이 뻔해 아무 소리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돌부처의 군포도 부담하기로 하였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표독한 원님과 아전이 돌아간 뒤 마을의 노인들이 모여 어떻게 추가된 면포 두 필을 마련할까 걱정하는데 어느새 그 석불의 어깨 위에 면포 두 필이 얹혀 있더라는 것입니다 오래 된 전설이기보다는 어떻게든 그 지독한 가렴주구를 벗어나 보려는 가난한 농부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이야기로 어쩌면 그 조그만 석불이 이 땅을 불국토로 만들 미륵불(彌勒佛)이라고 믿는 민간신앙과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석불 자체가 즉 백골징포(白骨徵布), 황구첨정(黃口簽丁)으로 잘 알려진 조선후기 가렴주구의 현장이자 증거물인데 도대체 그 석불이 어떻게 생겼는지 늘 궁금해 해마다 4월 초파일에 아내와 같이 방문하여 법당의 부처님을 보고 절을 하고 점심공양을 했지만 그 돌부처의 행방을 물어볼 자리도 딱히 없어 무려 3년이 넘도록 문제의 석불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 했습니다.
그러다 작년에 점심공양을 하고나서 밥을 차려주는 50대 초반의 보살님께 소재를 물어보니
“아아, 그 석불은 대웅전의 부처 안에 있어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제가 이 절에 처음 다니기 훨씬 전에 법당의 부처 안에 석불을 넣고 부처를 조성했다고 들었지요.”
하는데 별로 자신감이 없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해마다 초파일에 절을 하던 그 부처 속에 석불이 들었다는 이야기로 도금(淘金)한 금동불(金銅佛)안에 돌부처가 들었다는 겁니다.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남의 부처를 헐어볼 수도 없어 작년에는 그냥 돌아왔지만 늘 마음이 개운치 못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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