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平里) 선생의 명촌리 일기 (28) 찔레꽃, 그 '기억의 고집' 속에

이득수 승인 2020.05.29 23:03 | 최종 수정 2020.05.30 00:08 의견 0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Khan Academy 유튜브 캡쳐]

여러분은 혹시 '기억의 고집'(혹은 기억의 지속, 스페인어 : Persistencia de la Memoria, 영어 : The Persistence of Memory)이란 명제(命題)를 들어본 일이 있나요? 일상생활과는 많이 동떨어진 다소 난해하고 거북한 느낌의 이 말은 피카소와 더불어 현대회화의 쌍벽을 이루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유명한 작품의 이름으로 지금은 동서양 모든 나라, 모든 계층의 인류에게 널리 회자(膾炙)되는 말입니다. 

그 그림은 오랜 시간의 무게를 못이겨 방금 녹아내리는 회색의 시계가 아직도 고집스럽게 자신이 애초에 가리키던 시점이자 멈춘 시간에 시침과 분침을 완강하게 고정시킨 형상입니다. 말하자면 그가 그린 일련의 그림들은 그렇게 '기억의 고집', '기억속의 시간' 등 인간의 의식 속에 자리잡은 최초의 기억과 그 기억의 여운을 복구하려는 것입니다. 
 
제 전공은 아니지만 아니지만 간단히 그 배경을 설명하자면 모든 사람은 그의 최초의 기억이 형성되던 시절의 망막에 어린 형상, 귀에 들리던 음향, 코에 스치던 냄새와 피부에 스치던 촉감과 통증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추억하며 그 시절이나 그런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근한 어머니의 품과 자장가, 젖 냄새, 뺨을 비비던 촉감, 엉덩이를 두드려주던 느낌 등을 우리는 아무도 잊지 못해 아무리 지독한 흉악범이라도 눈물을 흘리며 불러보는 이름 '어머니'가 되고 아늑한 고향마을의 꽃과 새, 우물가와 골목길, 바람소리와 무지개가 '향수(鄕愁)'가 되고 처음 느낀 이성(異性)의 체취나 미소가 아편처럼 평생을 중독 시키는 무지개가 되고, 아련한 '첫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거나 나이가 든 사람은 누구나 필연적으로 그런 모정이나 향수, 첫사랑 같은 '기억의 고집'에 침몰되는데 그 가장 단순한 예가 KBS 「가요무대」를 비롯한 단순하고 반복적이며 감상적인 트로트에 빠지거나 박수근의 「빨래터」처럼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아득한 기억속의 마을 고향으로 달려가 어머니를 만나고 흑백영화처럼 흐릿한 첫사랑을 회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와 소설, 그림과 연극, 영화, 노래와 오페라와 음식과 술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취미와 도락(道樂), 예술은 모두 자신의 일상(日常)을 넘어 늘 '기억의 고집'에 매달려 마침내 '침'몰되는 과정이랍니다. 그래서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나 훌륭한 예술가 또 복싱챔피언이나 흉악범까지 어머니와 고향과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기억의 고집'이란 수렁에 빠진 '기억의 노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명촌리 고래뜰 도랑가에 핀 찔레꽃 [사진=이득수]

오늘따라 너무 난해한 이야기로 문을 열었는데 사실은 우리의 대중가요 〈고향초〉의 가사 

 찔레꽃이 한 잎 두 잎 물위에 날으면

이라는 아주 짧고 감상적인 가사 한 줄을 통하여 우리의 모정과 향수와 첫사랑, 그러니까 '기억의 고집'이란 그 완강한 감옥을 재확인하여 그 감미로운 감성의 창살에 제 마음이 다시 수감되기 위해서 입니다.

1947년, 해방은 되었지만 아직 정부수립도 안 된 시절, 일제에 수탈당한 산천은 헐벗고 남부여대한 귀국동포로 부산을 비롯한 도시마다 넘쳐나 모두가 헐벗고 굶주리며 판잣집을 지어 기거하던 그 시절에도 봄은 오면 꽃이 피고 새가 울었을 것입니다. 그 땅에 멀리 만주에서, 일본에서 독립군이나 학도병과 징용자, 심지어 아편장사나 밀정이 되어 이국땅을 떠돌던 사람들이 고국이라고, 고향이라고 돌아와 그립던 어머니를 만나기는커녕 너무나 가난하고 참담한 현실 앞에 숨 가쁜 탄식을 터뜨린 노래가 바로 김해송 작곡 조명암 작곡 송민도 노래의 〈고향초〉입니다. 

애초 고향초의 가사는 

남쪽나라 바다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뽕을 따는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정든 고향 정든 사람잊었단 말이냐

의 애상(哀傷)이 가득한 가사 1절로 암울한 역사와 지친 여정, 당면한 생활고에 시달린 실향민들이 마음을 사로잡고 맙니다. 그러나 한국동란이라는 전대미문의 아비규환을 벗어난 5년 뒤 휴전이 협정되고 피난민들이 하나둘 서울로 돌아갈 때 순박하기만 하던 시골처녀 순이와 금순이가 오랜 동경(憧憬)이자 화려한 황금의 성(城)인 서울로 슬그머니 딸려가 저도 몰래 낯선 밤거리의 '아레나'가 되어버리는 현실을 장세정이란 젊고 아리따운 가수가 아련한 회상과 통탄을 담아 리바이벌했습니다.

그 새로운 찔레꽃의 2절의 가사를 보면 

기러기가 울고 가는 고요한 밤에
이슬 맞은 들국화가 고이 잠들 때
별을 따는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정든 산천 정든 땅을잊었단 말이냐

그 때까지만 해도 그 애탄의 가사에는 곧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가을들판의 고향에 몰래 떠난 순이와 금순이가 돌아와 다시 갑돌이를 만나 초가삼간을 짓고 논밭을 가꾸는 귀향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1989년 홍민의 〈찔레꽃〉은 좀더 애련한 그리움과 비탄을 담고 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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