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平里) 선생의 명촌리 일기 (25)논고동(우렁이)찜의 추억

이득수 승인 2020.05.23 15:22 | 최종 수정 2020.05.23 15:41 의견 0
민물고기 잡기 챔피언인 명촌리 노인회장

우중충한 봄비가 내리다 그치고 잠깐 볕이나 산책을 나섰는데 다시 또 비가 부슬거려 오도가도 못 하고 바들 못 둑에서 서성거릴 땝니다. 저 아래 쪽 저수지 수로입구에 저 또래의 웬 늙은 농부하나가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고개를 숙여 물에 잠긴 버드나무 가지를 맨손으로 훑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재 지금 뭐 하능교?”
하고 조심스레 말을 붙이니 놀라 고개를 뒤로 돌리고

“아, 논고동이 있는가 싶어서...”
“그래 좀 잡았능교?”
“야, 날도 많이 가물어 물이 빠졌지만 요새는 아무도 안 잡으니 쪼깨 있네요.”
“흰새(백로)가 다 묵어뿐다 카던데요.”
“흰새도 나무 밑에는 못 잡지요.”
“그렇구나. 논고동 삶아 까서 정구지하고 회로 무쳐먹어도 좋고 고치미 넣고 논고동찜도 좋지.”
“아재도 고치미 논고동찜을 아네. 나도 우리 어무이가 죽기 전에 한번만 더 해묵자캐서.”
“어무이가 몇인데요?”
"구십 하고도 둘이요.”
“그렇구나. 많이 잡으소.”

논고동 줍느라 엉덩이를 하늘로 쳐든 후리마을 농부

하고 돌아서면서 그만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문맹의 우리어머니는 손끝이 아무치거나 성격이 다정다감하거나 음식이나 집안치장 같은데 전혀 관심이 없이 그저 농사일과 노점상만 열중한 분이라 저는 주로 아버지와 누님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어머니도 몇 가지의 음식은 특별히 잘 했는데 그건 우리 아버지가 장복하시는 농주와 무로 담는 시원한 동치미와 초겨울에 가끔 해먹는 논고동찜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논고동찜은 늦은 가을 벼를 벤 논이나 웅덩이에서 잡은 월동 전의 논고동을 삶아 까서 고치미, 들깨가루, 찹쌀가루 등을 넣고 물을 넉넉히 잡아 누구스럼하게 끓여 훌렁훌렁 마시다 시피 먹는 별미(別味)였습니다. 아버지를 비롯해 전 가족이 참 좋아했는데 객지에 나가 어쩌다 미더덕과 콩나물에 고사리와 토란줄기 등을 넣고 그 비슷한 찜을 만들어 상에 올리는 식당이 있으면 오래 회상에 젖곤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빠질 수 없는 예기하나.
논고동찜을 하려면 우선 논고동을 한 소쿠리쯤 잡아야 하는데 저수지가 없는 우리 마을에선 물기가 많은 천수답과 웅덩이가 있는 진장골짝, 장승백이골짝에 추수가 끝난 11월 말이나 12월 초에 주로 잡았습니다.(미인천하 단톡방의 친구 영선 씨는 잘 아실 것) 그런데 그 때 이미 살얼음이 논의 뒷두름 아래 도구를 쳤던 자리 주변을 잘 살피면 500원이나 100원짜리 동전크기로 눈에 뵐 듯 말듯 옴팡하게 땅이 꺼진 부분이 있는데 그게 바로 논고동이 월동하는 자리인 것이지요. 그럼 오른 손 검지와 중지로 찔러 잡아 올리면 되는 데 저는 아버님이 몸이 아파 일 년 내내 농사일을 하거나 나무를 하기 때문에 마을의 또래 아이들 중에 달리기나 스케이트타기에는 꼴등이지만 그 논고동잡기 하나 만은 거의 달인이었지요. ㅎㅎㅎ

며칠 뒤 화창하게 날이 개어 골안못을 돌면서 한참동안이나 늘 논고동과 어머니를 회상하는데
“어이, 홍식이 외삼촌!”

하고 누가 못둑 아래서 손짓하며 부르는데 핑크빛 티셔츠의 명촌리 노인회 변원식 회장님이었습니다. 손재주가 좋아 통발과 낚시로 물고기 잡기의 상북면 챔피언에 두더쥐나 새를 쫓는 별 희한한 기구를 다 만들어내는 명촌리의 맥가이버입니다.

자랑스런 어획물 우렁이(논고동)를 보여주는 명촌리 노인회장

“회장님 며칠 전에 누가 논고동 잡아가던데요?”
“아, 그 사람은 후리 사람인데 나 보다 하수(下手)야. 물이 쫙 빠졌을 때 손으로 바닥을 훑어야 큰 게 잡히지 물에 빠진 버들가지를 훑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야.”

하고 득의양양해 하기에 

“그러믄요.”
존경의 눈빛을 보내자

“다 늙어서 괜히 똥짜바리나 하늘로 쳐들고...”
하며 웃는데

“똥짜바리라니요?”
“똥짜바리나 미자바리나 그게 다 엉덩이지 뭐.”

하고 또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자, 사진 찍을 거제?”
하며 스스로 논고동 한 줌을 잡고 촬영에 임해주었습니다. 그 날도 참 재수 좋은 날,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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