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옹(進翁) 시인의 간월산 산책 (23)간월산, 세수한 날

이득수 승인 2020.05.21 23:50 | 최종 수정 2020.05.23 15:42 의견 0
순정뜰에서 본 간월산과 신불산 [사진=이득수]
순정뜰에서 본 신불산(왼쪽)과 간월산(가운데) [사진=이득수]

어제, 그제 이틀간 비가 질금거리다 오늘 모처럼 개었습니다. 오전에 언양읍의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를 마치고 110분 간격의 비스를 놓치자 앓느니 죽는다고 다시 110분을 기다리느니 90분쯤 걸리는 들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태화강 상류를 건너 상북들에 들어서는 순간 저도 몰래 “아하!” 소리와 함께 눈 앞은 물론 가슴까지 환하게 트였습니다. 봄마다 기승을 부리던 황사나 미세먼지가 사라진 영남알프스의 아스라한 산 능선이  커튼자락처럼 부드럽게 펼쳐진 산기슭에 봄빛은 또 얼마나 푸르고 포근한지... 매일 보는 간월산, 신불산이지만 오늘처럼 깨끗이 씻은 민낯을 보여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제 체력이 떨어져 저 단아한 능선과 간월재를 오를 수는 없습니다만 그저 바라보는 것만 해도 가슴속에 파란 풀빛이 물들 것만 같습니다. 제가 고향신불산을 찾아 간월산기슭에 집을 지은 것은 정말 좋은 선택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따라 밝얼산 긴등 아래 '순정마을'이 유난히 포근하고 아늑합니다. 한문으로 마을이름이 무슨 자를 쓰는지는 몰라도 그저 마을이름만 들어도  

'순정의 샘이 솟은 내 젊은가슴 속에 내 맘대도 버들피리 꺾어도 불고...'

<마음의 보석상자>라는 노래가 절로 나올 것 같으면서 왠지 저 마을엔 물물이 착하고 예쁘고 순수한 순정(純情)파 처녀들이 자라난 것 같은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순정의 샘이 솟는 순정마을 뒤쪽은 밝얼산과 오두산
순정의 샘이 솟는 순정마을 뒤쪽은 밝얼산과 오두산

그러나 '순정마을'은 얼핏 눈에 들어오듯 그렇게 평온한 마을만은 아닙니다. 19세기 후반 대원군의 천주교박해가 한창일 때 저 간월산 너머 죽림굴에 김범우 신부를 비롯한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은신하며 영남알프스의 산줄기를 따라 포교를 했는데 그 결과가 배내재와 석남재 사이의 깊은 계곡 살티마을과 이 순정마을과 왼쪽 길천마을에 천주교 공소(公所)로 남은 것입니다.

재너머 죽림굴에서 순정마을에 닿으려면 죽림굴에서 배내재까지 한 시간을 걸어야 하고 배내재에서 긴등이라고 물리는 밝얽산 산등을 타고 세 시간이나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정마을이 평지에서는 죽림굴과 천당에 이르는 입구지만 죽림굴과 신부님에게는 세상을 향한 첫 번째 촉수(觸手)같은 곳이겠지요.
 
그 밖에도 이 순정마을에는 가난한 배내골 총각 석이와 순정마을 처녀 정아의 이루지 못할 사랑이 '정아바위'로 남은 애틋한 러브스토리도 있는데 차자 상세히 올리기로 하겠습니다.

순정의 샘이 솟는 순정마을 뒤쪽은 밝얼산과 오두산
순정뜰에서 만난 동년배 농부가 못자리 도랑을 치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 한창 모내기 준비를 하는 제 또래 동년배 농부를 만나 제 어릴 적에 모심을 논에 물을 잡고 논두렁을 삽으로 바르던 이야기를 하며 생면부지의 두 초로(初老)가 껄껄 웃었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굳이 들길을 파랗게 덮은 들풀이나 노란민들레가 아니라 지나가는 바람이나 구름까지 다 샹쾌하고 아름다운 날입니다. 아무 밑천도 공로로 없이 참으로 행복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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