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옹(進翁) 시인의 간월산 산책 (26)삼성각, 벼려진 시간들

이득수 승인 2020.05.20 18:22 | 최종 수정 2020.05.21 00:12 의견 0
사진1. 산신각자리에 간신히 웅크린 삼성각
산신각 자리에 간신히 웅크린 삼성각. [사진=이득수]

이끼 낀 바위와 등이 굽은 소나무와 오래 된 석탑이 잘 어울리는 북쪽 탑이 앉은 언덕 밑에 좁고 기다란 건물하나가 숨어 있습니다. 석조여래좌상전과 함께 간월사에 남은  단 두 개의 건물이지만 볕도 잘 안 드는 언덕 아래 북향으로 앉아 뭔가 괴이쩍은 분위기에다 화려한 단청(丹靑)마저 귀기(鬼氣)가 서린 것 같습니다.

'三聖閣'이란 현판이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옛 산신당이 임진왜란과 일제강점 당시 두 번이나 파괴된 후, 기존의 산신은 물론, 용왕(龍王)전, 명부(冥府)전, 심지어 조사(祖師)전이나 독성(獨聖)전에 이르기까지 불교와 민간신앙에 관련된 온갖 잡신과 덕이 높은 고승(高僧), 심지어 오래 공부하여 득도하였으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단(異端)인 독성(獨聖)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을 뺀 모든 경배(敬拜)자를 다 모시고 아무나 와서 공을 들인 것 같아보였습니다.

대웅전인 금당터 옆의 북쪽 탑 아래 으슥한 곳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아마 원래는 산신각이었을 것입니다. 산신각은 처음 산을 깎고 절을 지을 때 공사를 하는 석공이나 목수, 스님과 공양주등을 원래 주인인 산신 호랑이가 잡아먹지 않도록 동자를 거느린 고승, 또는 신선이 호랑이를 제압하여 강아지처럼 거느린 모습을 그려 절의 가장 높고 기가 센 곳에 모시는 건물입니다. 독실한 불교신자가 아닌 일반손님이나 등산객도 보통 이 산신각에 가면 그 동화적인 분위기에 마음이 편해져 절로 복전을 바치고 절을 하게 됩니다. 

저의 경우 어떤 스님이 아무리 경을 읽어도 득도를 하거나 해탈을 할 절 식구로 태어난 것이 아니니 어느 절이나 암자에 가더라도 반드시 산신각에 들러 한 100곳의 산신께 공을 들이면 하는 일이 잘 풀리고 나름 성취가 있을 것이라 하여 한창 등산을 하던 시절 전국의 수백 사찰과 암자의 산신각을 순례한 적이 있습니다. 또 퇴직 후에는 아예 지도책을 사들고 금정산과 가장군 일대의 작은 암자 근 50곳의 산신각과 성황당을 돌았는데 무슨 효과나 깨달음보다는 산신께 절을 하고 나와 등산화를 신으면서 고개를 들면 맞은 편 하늘이 환하게 트이면서 그냥 마음이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부서져 나뒹구는 각종 잡신의 비석.

이 '삼성각'이란 정체불명의 건물의 내력을 알기 위해 안을 들여다보니 역광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곰곰 생각하기로 이 건물은 원래 일제 강점기에 일인이 절 전체를 파괴하고 그나마 산신과 함께 그들이 좋아하는 용왕(해신과 바람)을 모시려 이 건물 하나를 남겨둔 것을 인근의 떠돌이 중이나 무당들이 제 맘대로 점거하여 공을 들이고 굿을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여기서 잠깐 시선을 돌려 삼성각에 모신 신주(神州) 중의 하나인 독성(獨聖)에 대해서 얘기할까 합니다. 누구든 반드시 무리지어 살아야 하는 인간의 속성상, 정계나 학계나 종교계, 심지어 싸움으로 살아가는 무협(武俠)들의 세계에도 그 중심 세력을 이루고 국가나 사회의 인정을 받는 정파(政派)가 있고 그 반대로 그 정파에게 소외되어 독자의 길을 가는 독불장군 형태의 별종, 벽파(僻派)도 있을 수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호국불교 신라의 으뜸스님이 된 의상(義相) 같은 분이 정파라면 '일체유심조'를 외치며 민중 속에 파고들어 독자세계 화쟁사상을 부르짖은 원효스님은 벽파이며 무협지에도 소림파 장문인과 제자들은 정파, 변방의 새외(塞外)고수들은 벽파가 되어 사악(邪惡)한 존재로 치부됩니다. 

진옹(進翁) 시인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사회조직에는 이렇게 주체 세력과 아웃사이더가 있기 마련인데 요즘은 신분이나 신념보다는 경제적 지위에 따라 경영자나 자본가는 정파가 되고 소상공인이나 비정규직은 벽파가 되는 참으로 불합리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젊어 40년을 공직에서 보낸 저는 기관장의 눈치를 살피고 호위병을 자처하는 정파가 되지 못하고 그저 맡은 일이나 하며 자유로운 공상과 시(詩)적 명상에 집중하는 외톨이가 되어 마치 무협지의 독성(獨聖)이나 종교계의 이단(異端)과 같았지만 모질게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변해 만인과 만인의 전쟁 속에 우리 모두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판이니 누구 하나 일생을 일관하여 자기 무리의 중심이 되어 정파로 살며 단 한 번도 독성 취급을 받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고 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죄 없이 따돌림은 받거나 대책 없이 외롭거나 삭막하지 않으신가요?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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