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平里) 선생의 명촌리 일기 (20)뭐, 민들레홀씨가 낭만적이라?

이득수 승인 2020.05.17 15:54 | 최종 수정 2020.05.17 16:11 의견 0
전 세계에 번진 노란민들레와 홀씨
노란 민들레

만약 가장 정겹고 아름다운 전원의 풍경을 꼽으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대체로

 1.풀잎 끝에 매달린 투명한 이슬방울에 아침햇살이 비치어 무지개가 아롱진 모습
 2.동그란 집을 짊어진 달팽이가 북채처럼 생긴 두개의 더듬이를 앞세우고 기어가는 모습
 3.천진한 소녀(少女)가 민들레 홀씨를 불어 바람에 날리는 모습

등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만큼 민들레의 노란 꽃송이도 아름답지만 동그랗고 하얀 홀씨도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에도 절로 마음이 끌립니다. 그러나 그 아름답고 살가움에 바로 함정이 있습니다. 민들레는 결코 깜찍하거나 부드럽거나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며 지상에서 가장 억세고 치열한 식물인 것입니다.
 
만약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분이라면 벌써 눈치 챘겠지만 저처럼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은 바람으로 수분(受粉)을 하는 풍매화(風媒花)인 버드나무, 소나무의 송홧가루가 날리는 4월에서 6월까지가 일년 중 가장 살아가기 어려운 악몽의 터널일 것입니다. 
어떻게든 멀리 또 빨리 자신의 분신인 씨앗을 날려야 하는 버드나무와 소나무는 씨앗의 크기를 가장 작고 가볍게 만들어 바람에 날리는데 반해 곤충이 꽃가루를 매개하는 충매(蟲媒)화 민들레가 비록 조그맣긴 하지만 또록또록 야무지게  코팅까지 된 씨앗이 일단 완성되면 그걸 멀리 날리려 바람개비처럼 솜털을 매달아 공중에 흩뿌리는데 그걸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후후 부는 모습을 가장 전원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으로 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꽃가루와 씨앗은 바람에 날려 자신이 닿은 곳이면 자갈밭이든 가시덩굴이든 어디든 바로 뿌리를 내리는데 성경에 나오는 '한 알의 밀알'처럼 용케 자리를 잡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번식에 성공하는 경우가 한 1-20%도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가다 골목길의 계단 틈이나 도로포장이 갈라져 약간의 흙먼지가 쌓인 곳이면 어김없이 민들레나 잡초가 자라는 것, 모질게, 모질게 아주 작고 앙증맞은 노란 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악착같이 터를 잡는 홀씨 중에 가장 불행한 놈이 바로 사람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간 놈입니다. 멋모르고 잡초처럼 돋아난 코털사이로 수분이 촉촉한 젖은 땅에 뿌리를 내리려 하지만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다가 벼락을 맞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콧속이 간질간질하면서 사정없이 재채기가 나고 콧물이 흐르면서 머릿속까지 지끈거리니 이런 벼락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코를 풀고 화장지로 닦아내고 약을 먹고 면봉으로 닦아내니 지금껏 사람의 콧속에서 뿌리를 내린 민들레는 단 한 포기도 없지만 민들레 홀씨로 알레르기를 앓은 사람은 해마다 수천만 명이 되는 것입니다. 

민들레 홀씨를 입으로 불어 날리는 외손녀 김현서(8세)

그렇다고 이 민들레를 우리는 그저 후후 불고 가지고 놀다 코를 휑 풀면 되는 그런 가벼운 존재로 보면 절대 안 됩니다. 민들레를 한자로는 포공영(布公英)으로 부르는데 우리는 마지막 영(英)자에 주목해야 됩니다. 우리가 보통 꽃뿌리 영(英)으로 새기는 이 영은 영웅호걸의 첫 번째 글자입니다. 선인들이 얼마나 우주의 원리를 잘 파악했는지 한자가 생기던 한 3000년 전의 중국인은 아무리 사나운 맹수나 일국의 왕도 죽으면 파리나 모기 같은 곤충이나 미생물에 의해 썩어진다는 사실을 보고 지상의 모든 생명체의 우월을 정했는데 그 내용은 우리의 상식과 정반대입니다. 도표로 표시하면

인간(동물)<어류<곤충<나무<풀<이끼류<미생물

의 순서인데 그건 살아서 누가 누굴 헤치고 먹느냐가 아니라 죽어 최종 분해(分解)될 땐 누가 더 강하냐입니다. 사람이 나무를 꺾고 동물이 부러트린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나무를 다 벨 수가 없어 미구에 죽어 나무그늘에 묻혀 거름이 되는 식으로 나무가 풀을 덮어도 풀은 더 넓게 번지며 그 모든 것의 최후의 승자는 가장 연약하지만 가장 번식력과 분해력이 강한  미생물이며 그 위에 아예 죽고살고가 없는 무기질의 광물인 바위 같은 것이 영원(永遠)한 시간 속의 절대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문에서 영웅(英雄豪傑)의 영(英)은 만 명을 다스릴 큰 장수, 웅(雄)은 천 명을 다스릴 재목, 호(豪)는 백 명을 거느릴 자, 걸(傑)은 열 명 중에 가장 뛰어난 자를 이름인데 모든 동물계의 수장(首長)인 웅(雄)앞에 식물 중의 으뜸 영을 배치하는데 그 영(英), 그러니까 지상의 모든 생명체의 으뜸이 바로 포공영으로 불리는 민들레입니다.

그러면 왜 저 보잘 것 없는 풀꽃 민들레가 그렇게 엄청난 자리를 차지하였을까요? 그건 우선 아무리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토질이 메마르거나 습하거나 단 한줌의 흙만 있으면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우고 백두산 천지든, 한라산 백록담이든, 미국의 그랜드캐넌이든, 러시아의 툰드라나 동토(凍土) 시베리아에서도 번져나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기다 그 조악한 조건에서도 어떻게 광합성을 하는지 민들레는 나물거리로서 또 간에 좋은 영양식품으로도 손색이 없으며 노란 꽃과 동그란 홀씨의 모양이 그렇게도 아름다우며 봄이 되면 가장 먼저 꽃을 피우기까지 하니 사람들이 현혹될 수밖에 없겠지요.

평리(平里) 선생

그래서 민들레는 노랫말로 시나 수필, 소설의 제목으로도 많이 등장하는데 제가 알기로 〈민들레 홀씨 되어〉라는 가요도 있고 강신재의 소설 〈임진강의 민들레〉는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 한 병사가 강변에서 총을 맞고 죽는 순간 그가 받은 훈장이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고향의 민들레를 연상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전쟁이란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는 이야기지요. 또 〈아이를 잘 낳은 여자〉로 잘 아려진 재독 닥종이공예가 김영희 씨는 머나먼 이국땅에 핀 민들레를 캐 잎과 뿌리를 나물로 먹으며 해마다 태어나는 아이들을 먹여 살리며 나중에 벽안의 연하남을 만나 여전히 민들레를 먹으며 또다시 아이를 낳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민들레, 그 참 대단한 식물입니다. 알레르기환자 여러분, 아무리 괴로워도 차마 미워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노란 민들레꽃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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