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옹(進翁)시인의 간월산 산책 (27)꼴불견 왜색잔재

이득수 승인 2020.05.26 00:55 | 최종 수정 2020.05.26 01:08 의견 0
사진1은 공적비와 왜색 시멘트비(碑)
간월사 삼성각 뒤에 있는 공적비와 왜색 시멘트비(碑)

삼성각의 뒤쪽에는 제법 구색을 갖춘 검은 돌 오석(烏石)으로 만든 비석이 하나 있어 비문을 읽어보니 관세음보살조성공덕비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부처님의 현신으로 위기에 처한 불제자나 중생을 도와주는 역할을 해 '천수관음'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처라기보다는 부처님의 제자나 보조자 또는 중생의 보호자인데 그 관세음보살을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아마도 저 삼성각 안이나 인근 어디에 관세음보살상을 세워 그 조성에 공을 세운 자를 기리는 것 같았습니다.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이 아닌 보살상조성자의 비를 세운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기껏 일개 공덕비에 저렇게 거룩한 거북기단과 괴상한 짐승이 그려진 관(冠,모자)까지 씌워야 하는지 이건 왕릉을 파헤치고 내시의 공덕비를 세우는 것처럼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거기다 한 발 더 나아간 것이 바로 옆의 두꺼비나 거북 형태의 납작한 콘크리트 비입니다. 제가 부산 서구청에서 문화과장으로 재직할 때 숨은 문화재를 발굴하러 무속이 승(勝)한 송도의 바닷가나 천마산 기슭의 암자를 뒤지면서 발견하기로 저런 양식의 비는 모조리 일제(日帝)의 잔재(殘滓)였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말기 끝없이 밀리는 전세를 뒤집으려 일제가 수많은 학도병과 징용 및 정신대로 조선인을 잡아갈 때 그 학도병들의 무운장구를 빌기 위해 시멘콘크리트로 저렇게 저급한 비석을 급조해 세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건 해방 전 일본인이나 일본인에 부화뇌동한 세력이 잡혀가는 학도병의 무운장구를 빌기 위해 세웠고 스님이 아닌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혹세무민의 비손이나 굿을 벌이던 잔재, 전형적인 왜색잔재인 것입니다. 

사진2는 함부로 나뒹구는 온갖 잡신의 신주 
나뒹구는 온갖 잡신의 신주. 

기분이 언짢아 침을 퉤 받고 돌아서다 삼성각 축대 아래서 이리저리 나뒹구는 비석들도 한 무더기 발견했는데 그 비문이 '남무용왕대신'에 '용왕단'인 데다 옆에는 희한하게도 용왕이 아닌 용왕단을 세운 설판(주관이나 비용 부담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이 그 설판의 직책이 모대학의 교수라고 적힌 것입니다. 나라가 빼앗긴 암흑기나 해방은 되어도 숨 돌릴 틈도 없이 전화(戰禍)를 입던 그 참담한 시절에 배울 만큼 배운 양심 없는 식자(識者)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왜색이 무언지 민족의 얼이 무언지도 모르는 무지렁이들에게 혹세무민(惑世誣民)의 파렴치를 저지른 흔적인 것입니다.

귀갓길에 새삼 영남알프스 복합웰빙센터에서 케이블카를 연결한다는 간월재와 신불산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습니다. 저 높은 산꼭대기의 원상을 파괴하고 위락시설을 설치해 치적을 쌓고 민심을 얻으려는 위정자들은 정작 보물 370호 여래좌상이 안치된 신라의 고사(古寺) 간월사지, 화랑의 호국정신이 1,500년이나 면면히 이어온 간월사지의 금당터와 두 개의 3층탑에 서린 호국불법과 인간애, 그 민족정서를 외면한 채 거창한 토목사업에 몰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코 밑에 간월사지가 있는지, 보물로 지정된 여래좌상과 그림 같은 두 탑이 있는 걸 알기나 하는지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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