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옹(進翁) 시인의 간월산 산책 (28)금상첨화 연꽃바위

이득수 승인 2020.05.26 17:11 | 최종 수정 2020.05.27 18:12 의견 0
사진1. 들꽃 같은 누님이 낳은 수련같이 고운 딸
들꽃 같은 누님과 수련처럼 고운 누님의 외동딸

간월사지를 두 번째 방문하던 날은 두 명의 누님과 아내가 동행했는데 입구의 석조여래좌상전과 금당터와 두 탑을 두르고는 봄볕이 따뜻한 풀밭에서 쑥을 뜯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한참 흩어져 다들 쑥을 뜯는데 혼자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온갖 공상을 다 하던 제(무신론자)가 넓고 둥글지만 새까맣게 그을린 바위 하나를 발견하고

“그 참 묘하게 생긴 바위네!”
하는 순간 교회의 집사이자 장로의 모친인 셋째 누님이
“그건 다 하느님이 알아서 내신 것이란다.” 하신다.

허리를 한 번 펴고 다시 쑥을 뜯는데, 가끔 절에 다니는 막내누님이
“아니야. 색깔이 검어 그렇지 영판 연꽃이네.”
하는 얼굴이 환했습니다.

순간 저는 저도 몰래
“빙고!”
하며 새삼 제 바로 손위의 아시누님을 찬찬히 뜯어보았습니다.

농사꾼 자식으로 늘 먹고살기에 급급한 부모를 닮아 누가 말을 않더라도 제 알아서 농사일과 부엌일, 소를 먹이고 나무를 하는 일을 마치 숙명처럼 받아들여 머슴처럼 알만 해온 김해 둘째 누님과 명촌 셋째 누님과 저는 태어난 의미 자체가 농사짓는 노동력이었습니다(제 형님은 장남에 공부를 잘 한다고 세자 책봉을 받은 것처럼 모든 일에서 열외, 막내 동생은 아직 어렸음).

그런데 말입니다. 언양지방에 '그 복잡한 콩나물독 안에서도 비스듬히 누워서 크는 콩나물이 있다.'는 속담이 있는데 제 큰누님과 막내누님은 평생 바쁜 일도 없고 답답한 일도 없이 그저 주는 밥이나 먹고 어영부영 지냈는데 우리 세 사람에게 그렇게 호랑이 같던 부모님이 이상하게 물러빠진 그 두 사람에는 아무런 타박도 하고 그냥 허허 웃어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잘 지내다가 시집을 간 큰 누님은 개가를 하고 전처 자식을 키우는 온갖 고생을 다 했지만 막내누님은 부지런하고 야무진 자영을 만나 아무 고생 없이 조금씩 재산을 모으고 살았고 외동딸을 어미와 전혀 다른 날씬하고 깔끔한 미인으로 낳은 데다 아들만 셋인 외손자 둘은 키가 2m 가까이 되지만 몸매나 얼굴이 모두 조각미남들이고 막내도 그리스신화의 미소년 아도니스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재작년 자영이 돌아가실 때 만만찮은 촌 재산에 엄청난 저축을 물려받아 지금은 장촌리경로당의 주요 멤버를 이루고 있으며 형제들이 만나면 즐겁게 밥을 사고 비서 제 아내에게 슬며시 카드를 꺼내줍니다. 그러니까 평소 아무 걸림 없이 모든 이웃을 다 다정하게 감싸는 우리 누님의 천심이 통(通)한 건지 동(動)한 건지 그 시꺼먼 돌덩이 하나를 보며 시 쓰는 동생을 놀라게 한 명언(名言)을 다 발사(發射)한 것입니다.

사진1. 들꽃 같은 누님이 낳은 수련같이 고운 딸
 막내누님의 외손자들

그래서 저는 한동안 우리 막내누님의 그 평온한 노후가 어디에서 왔는지 궁리하다 마침내 우리 부모님과 7남매의 신앙적 이력(履歷)에서 그 답을 찾았습니다. 

먼저 우리 가족의 신앙에 있어 그 정점은 열혈교회 권사인 둘째 누님입니다. 처녀시절 신경이 약해 잠깐 교회에 다녀 일약 광신도가 된 그녀는

 1. 농악상쇠를 지낸 민간신앙의 표본안 우리 아버지의 임종 직전 '만나'가 떡가루처럼 날리는 천국을 제시, 졸지에 회개하고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하여 기독교장을 치르게 하고
 2. 간암말기의 큰 누님을 집요하게 전도, 역시 회개하여 기독교장을 치르고
 3. 층층시하에 시집을 가 5남매를 낳고 남편이 일찍 죽은 셋째 누님을 눈물로 위로하다 교회로 인도(引導), 슬하에 장로1, 집사 3명의 기독교가문을 만들었지만
 4. 우리 집의 왕세자 형님은 너무나 결백하고 소심해 평생 고독한 천재로 살다 일찍 죽었고
 5. 누님이 자식처럼 키운 저는 어려서 교회에 다녔으나 성인이 되어 이 책, 저 책을 섭렵하다 중도 속도 아닌 독성(獨聖)이 되어버렸고(덤으로 천주교 믿는 올케 하나 획득)
 6. 처음 병을 고치자고 교회에 데리고 우리 어머니는 아무런 종교적 지각이 없어 교회와 절과 점집을 옆에서 누가 권하는 데로 종횡무진하다 마지막엔 불교장(葬)을 치렀고
 7. 제 막내 동생은 아예 종교에 관심이 없지만
 8. 세상에 별 답답한 일 없이 모두에게 친절하고 소박한 우리 막내 누님은 일 년에 딱 한번 '부처님 오신 날'에 절에 다녔는데 그렇게 노후가 좋은 걸 보면 사람은 무얼 믿느냐 보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과 이웃에 다가가느냐에 따라 행, 불행이 오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폐사에 놓여있는 시꺼먼 바위 하나도 이리저리 잘 살펴 '연꽃바위'로 보는 눈, 그게 어쩌면 부처님의 마음(佛心)이 아닐지, 우리는 매사 여유롭고 편안하며 세상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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