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平里) 선생의 간월산 산책 (26)새가 우는 명촌리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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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4 09:45 | 최종 수정 2020.05.2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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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명촌리의 특징을 알려면 우선 명촌리의 한문(漢文)자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보통 명촌리는 아침 햇살이 밝은 양지바른 마을 '명촌(明村)리'를 떠올릴 것입니다. 저도 처음 그렇게 생각했는데 마을 앞 안내비에 명촌리가 새가 운다는 울 명(鳴)자 '명촌(鳴村)리'라는 걸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이 마을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기름진 고래뜰을 터전으로 살아온 아주 오래된 마을로서 숲이 우거져 아침마다 새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난다고 그렇게 마을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남은 한 자 촌(村)자를 살펴보면 수풀 임(林)자의 숲에서 나무가지를 조금 베어내고 거기에 점을 찍듯이 작은 움막을 지은 형상이 됩니다.
이 마을은 이조 중엽 궁궐의 수비를 맡아보던 무관(요즘으로 치면 2, 3급 군수 정도)한 분이 귀향하여 '만정헌'이라는 크고 당당한 기와집을 지어 거주하면서 주변에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형성되어 울산지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양반마을이자 부촌으로 오래 된 민요 <언양의 노래>에
장촌의 길촌이요, 명촌은 부촌(富村)이요
라는 가사가 있을 정도로 번듯한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동구에 '계림김씨세적비'와 열녀문(烈女門)인 정려각(旌閭閣)있어 전통과 효제의 향기가 물씬 풍깁니다. 또 주변 마을에서는 그들을 '명촌 김씨'양반으로 부르고 자신들도 '계림 김씨'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한 5년 부딪혀보니 다들 신수가 훤하고 행동거지가 차분해 과연 양반의 자손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뒷산의 묘역이 잘 단장되어 있습니다.
제 어머니가 처녀 적에 명촌리에 살아 '명촌댁'으로 불린 데다 세째 누님이 명촌마을로 시집을 오는 바람에 제가 다시 명촌에 들어왔으니 참으로 깊은 인연인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 집 '명촌별서'는 누님집에 와서 가끔 보던 이웃 할아버지 '도산어른'이 돌아가시고 자식들이 떠나 집과 문전옥답이 모조리 대밭이 된 묵정밭을 제가 사서 지었습니다. 옛날 집터라 양지바르고 아늑하며 전망이 탁 트여 뜻밖의 횡재를 한 셈인데 부산에 살 때 파리모기와 소똥냄새를 몹시 싫어하던 제 아내도 어느 듯 꽃을 심고 채소를 가꾸는 시골아낙으로 잘 적응하고 자녀들과 손녀들도 여기 와서 할아버지의 분신 노란 강아지 '마초'와 노는 걸 매우 기뻐한답니다.
농사꾼 자식으로 고향에 돌아와 아늑한 집을 지은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인 셈입니다. 이곳에서 펼쳐질 제 여생(餘生)은 좋아하는 글을 많이 쓰고 그 안에 제가 늘 연연해하는 언양사람들의 삶과 애환, 민요와 풍습, 아름다운 명촌리의 풍경을 많이 알리는 일일 것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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