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이름값, 그 대의명분의 함정

포토 에세이 통산 1009호(2020.6.19)

이득수 승인 2020.06.18 17:02 | 최종 수정 2020.06.18 17:22 의견 0
National Palace Museum / Public domain
공자와 맹자 초상 [National Palace Museum / Public domain]

공자의 인(仁)으로 출발한 유교(儒敎)는 맹자의 의(義)를 더해 비로소 인의(仁義)라는 이념적 완성을 이루며 그 실행수단으로 사단(四端)을 제시합니다. 수오지심, 측은지심, 시비지심, 사양지심의 사단은 늘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웃과 가족에게 따뜻하게 대하며 옳고 그름을 따져 남에게 양보하며 부끄럼 없이 살라는, 오로지 '착하게 살라'는 생활지침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만사 그렇게만 살아가는 소위 '범생'이라면 늘 망설이고 시비를 따지되 되도록 상대에게 양보하며 소심하고 가난하게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공자맹자의 가장 큰 특징은 수레를 타고 열국(列國)을 철환(轍環)하며 춘추(공자), 전국(맹자)시대에 천하를 할거(割據)한 군웅들에게 인의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뜻 깊은 인의는 어디에서도 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방금 십여 개의 제후국이 서로 천하를 아우르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를 흘리는 판에 하늘의 뜻을 얻으려 어질게만 살다간 하루아침에 나라를 잃을 테니까요.

유교와 한문문화로 대변되는 중국과 동양문화가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바탕을 둔 패권주의 서양문명에 숨소리 한 번 못내고 패망한 것은 바로 공맹 이후 3000년을 그 고루한 유교적 명분에 얽매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유교의 명분론은 만천하의 생사여탈권을 쥐 황제라도 반드시 하늘의 뜻에 맞게 의롭게 살아 죽어 성군(聖君)으로 기록되어야 한다는 명분론을 주입시켜 살아서는 고대광실, 주지육림에 파묻히더라도 죽음에 앞서 자기도 성군이 되려 사초(史草)를 열람하려 덤비며 절대권위의 사관(史官)까지 핍박했던 것입니다.

이야기가 괜히 좀 심각해졌습니다만 오늘 이야기의 요지는 너무 완강하고 엄격한 유교적 대의명분에 집착하면 실리에 손해를 보고 도리어 그 명분의 희생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좀 더 쉽게 생각하면 우리나라는 사대주의라는 명분에 경도되어 일본이나 서양의 신문물을 받아들지 못하고 쇄국정책을 고집하다 끝내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단순히 한 가정을 보더라도 장자, 또는 종손개념이 너무 심해 오로지 장남과 종손에게 재산과 사랑을 몰아주는 바람에 이 땅에 태어난 지차(之次)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맨주먹으로 살아남아야 했으며 적서(嫡庶) 구별이 심해 홍길동의 저자 허균처럼 무단히 서자로 몰려 온갖 괄시를 받는 희생양이 되어 마침내 율도국의 혁명을 꿈꾸다 참살되는 것입니다. 

또 약소국 신라의 백성으로 당과 왜의 해적선에게 부모가 죽어 고아가 된 장보고가 중국으로 건너가 무공을 세우고 장수가 되어 완도에 청해진을 일구고 당시 싱가포르 지방에서 끊어진 동서양의 교역로를 서라벌과 왜가 있는 극동까지 개척해 '인류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 100인'에 30위 안에 들었음에도 불구, 골품주의의 안락에 젖은 서라벌의 귀족들은 거친 해도(海島)인, 섬사람이 왕의 장인이 되면 안 된다며 장보고의 딸이 왕비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자객 염장을 보내 만고의 영웅을 척살한 것입니다.

거기다 천년제국 신라를 왕건에게 바치고 귀부한 나약한 서라벌 경순왕의 족친으로 고려수도 개경에서 수백 년이나 호사를 누린 김부식 일당은 사대주의적 발상의 『삼국사기』를 저술함과 동시에 수도를 서경(평양)으로 옮겨 만주의 여진을 정복하고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을 회복하자는 천도주의자인 묘청과 함께 이 나라 제일의 서정시인 정지상을 무참히 참살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흔히 명분이니, 대의명분이니 하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을 좀 보십시오. 자기들이 필요할 땐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불리하면 아무소리 없이 비겁한 실리를 취합니다. 

그렇게 보면 세상에 의(義)는 있지만 대의(大義)는 없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무엇이 옳으냐의 의는 정답은 있을 수가 있지만 무엇이 보다 더 옳으냐의 대의는 그 때, 그 때의 위정자나 강자가 제 맘대로 아전인수(我田引水)로 인용하고 악용하는 것입니다. 그건 광주민주혁명이나 12·12사태 당시의 집권자들의 언행을 보면 보다 또렷해집니다.

오늘 이야기는 너무 지리하고 무거운 느낌인데 이 땅의 지각 있는 시민이라면 한 번쯤은 반드시 생각할 문제라 이 산골노인이 한 번 무리를 해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참으로 엉뚱한 명분론의 폐단 하나를 적시(摘示)하고자 합니다. 

1876년 인천에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던 해입니다. 조선을 삼키려는 자신을 견제하던 러시아와의 노일전쟁에서 대승한 일본이 겉으로는 조선과 일본이 대등한 독립국임을 인정하면서도 속으로는 부산을 비롯한 3개의 항구를 강제로 개항시키고 거기 이주한 일인이 마음대로 해안선을 측량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일본화폐로 물품을 사고파는 참으로 말도 안 되는 불평등조약이 그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이득수 시인

그 때 우리 측 협상대표는 무관출신 신헌으로 이미 나이 들고 병이 깊어 아무런 실무능력이 없었음에도 왕의 호위 금위대장을 맡았던 공로로 협상의 전권을 쥐 전권대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협상과정에서 일본 측의 구로다 대표는 세세하게 자국의 이익을 따져 반영시키는데 비해 신헌은 몸이 아파 그런지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마지막 협정이 조인되기 직전
“잠깐!”
위엄이 가득한 목소리로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협정서에 일본은 왜 대일본제국이라고 쓰고 우리 대한제국은 그냥 대한제국이냐?”
고 따져 구로다로 부터 그럼 대(大)대한제국이라고 써도 좋다는 승낙을 받고 협정의 완성 수결(手決)을 했다는 것입니다. 일국의 전권대사가 아무런 실익도 없는 그 얄팍한 명분의 큰 대(大)자 하나를 추가하고 협상을 마치다니요? 우리가 그런 명분의 나라에 살았고 그래서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일제암흑기 36년을 고생하신 겁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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