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그대, 쓸쓸한 풀밭에서 울어볼텐가?

포토 에세이 통산 1007호(2020.6.18)

이득수 승인 2020.06.17 13:01 | 최종 수정 2020.06.17 13:12 의견 0
이름보다 너무 화려한 흑싸리 꽃
이름보다 너무 화려한 흑싸리 꽃

클로버 꽃 누리끼리 시드는 풀밭 저 쓸쓸한 전망을 보라. 먼 산 능선 아래 나지막이 숨을 죽인 대밭과 이제 주춤주춤 물러서며 조용히 시들어가는 왼쪽의 억새, 희뜩희뜩 피어나는 망초꽃이 다 고요해 괜히 지나가던 내가 다 진중한 오후, 우리가 늘 <저 푸른 초원위에>로 꿈꾸던 초원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한 백년 산다는 꿈을 떠올려보라.
 
그러나 곰처럼 엎드린 산모롱이를 보라. 욕심 많고 갈등 많은 우리 인간은 저렇게 덤덤하게 엎드리지 못 해서 불행한 거다. 코끼리처럼 엎드린 저 야산하나로 산과 들과 풀과 대밭이 모두 평화롭다. 우리도 저렇게 흐트러지자. 그렇게 하루쯤을 행복해보자.

매일 눈뜨기가 괴롭도록 지친 사람아, 가만히 이 풀밭에 퍼질러 앉아보게. 괜스레 사람보기 괴로운 사람아,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고 발가락사이로 바람을 맞아보게. 그리고 산을 보게, 능선을 보게. 희뿌연 구름바다의 해살을 보게. 

명촌리의 묵정밭에서 언양읍을 바라보는 풍경
명촌리의 묵정밭에서 언양읍을 바라보는 풍경

우리가 아직도 살아갈 만한 것은 아무 생각 없이 길을 나서도 편안한 풍경이 펼쳐지는 것. 시골길을 걷다 귀 기울이면 자갈 틈으로 굴러가는 여울소리와 물새의 종종걸음도 짐작이 가고 새파란 논배미에 나르는 새하얀 해오라기 떠올라서다. 그렇게 우리 사는 풍경은 평온하고 하루는 행복하다. 그렇게 호사를 누리는 거다.

외로운 자 모름지기 들로 나서라. 서러운 자 무심히 들꽃을 보라. 어디서나 버림받는 흑사리쭉지, 그 흑싸리 꽃 진자주 바탕, 눈부신 황금빛 꽃술을 보라. 저 망초를 망할 놈의 꽃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 잊지 못해 이름, 못 잊어 밤을 샐 불망의 망(忘)일 게다. 

누렇게 말라가는 목초(牧草)들)
누렇게 말라가는 목초(牧草)들

부자의 정원이 아니라서 포근한 거다. 묵정밭이라 행복한 거다. 약육강식의 도시에서 말더듬이가 된 이 시대 을(乙)의 무리들아, 그냥 무심히 풀밭에 오라. 비스듬히 누워 눈썹위로 나부끼는 풀잎을 보라. 행복, 그거 별거 아니다. 조용히 풀잎을 보다 잠이 드는 것, 그렇게 내가 풀잎 되는 것이다. 

 외로운 자들아, 서러운 자들아, 
 그냥 한번쯤 풀밭에 오라.
 괴롭고, 안타깝고, 지친 사람아,
 무심히 고개 들어 먼 산을 보라.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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