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신록(新綠), 선경(仙境)의 입구에 서서

포토 에세이 통산 1012호(2020.6.23)

이득수 승인 2020.06.22 16:30 | 최종 수정 2020.06.22 16:42 의견 0
명촌별서에서 바라본 푸른 세상
명촌별서에서 바라본 푸른 세상

굳이 심심산골이 아니더라도 시골에 사는 사람이 조금 유심히 살피면 하나의 산이 사시사철 그 바탕색을 바꾸어 가며 일 년에 적어도 대여섯 벌의 옷맵시를 자랑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낙엽이 죄다 떨어진 앙상한 활엽수와 사철 푸른 침엽수가 어우러진 겨울풍경은 어떨까요? 소나무, 사철나무가 1년 내내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만 11월 말경이면 소나무는 1년에 딱 며칠, 해류에 실려 오는 붉은 빛 플랑크톤 곤지를 먹고 제 배가 빨갛게 부어오른 <곤지멸치>처럼 문득 가지 가득 황홀한 갈비(솔잎)를 떨어트려 산비탈이나 임도를 걸어가면 눈부신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의 장관을 연출합니다. 그렇게 한 절반 정도의 묵은 잎을 떨어트린 앙상한 가지로 겨울을 난 소나무는 3, 4 월경부터 솔잎 끝에 연한 연두색의 아기손가락처럼 긴 꽃대를 내밀어 자주색의 솔방울 대여섯 개를 북채처럼 동그랗게 매답니다. 

그렇게 다 자란 솔방울은 5월 말경 같은 지역의 소나무들이 적당하게 바람이 부는 날을 택하여 일시에 하늘 가득 꽃가루를 쏘아 올려 동시에 수분(受粉)을 하는 것입니다.(이는 제가 작년 5월에 마치 산불이 난 것처럼 누런 꽃가루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놀라운 장면을 찍어 포토 에세이에 올린 바가 있습니다.)

비단 소나무뿐 아니라 대나무나 사철나무 종류도 기본적 초록색은 유지하되 1년에 절반 정도 잎을 가는데 대나무는 겨울에, 사철나무나 쥐똥나무 등은 새 잎이 다 피고 난 5월 말경에 묵은 잎을 떨어뜨립니다.

그런데 회갈색의 낙엽이 떨어진 활엽수와 덩굴나무들은 얼크러진 산기슭은 한겨울의 고비 1월 말, 2월 초가 지나면 아주 은밀하게 숲의 경관을 바꾸는데 활엽수와 떨기나무의 몇 종류는 그 가지들이 은은한 자주색으로 또 몇 종은 연두 빛이나 연초록, 노랗게 밝은 색을 띄며 날마다 숲 전체가 밝고 투명해지며 봄맞이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3월 중순쯤 분홍빛 참꽃(진달래)과 노란 생강꽃, 하얀 조팝나무 꽃이 피고 이어 산벚꽃, 돌복숭아, 돌배나무의 붉고 흰 꽃이 어우러지고 한층 연한 색의 연달래와 너무 짙은 붉은 색에 진액까지 끈적거리는 철쭉까지 피고 그 위로 아지랑이가 스멀거리면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이 그 화려한 광경에 눈이 부시고 정신이 아뜩해져 고라니와 산토끼, 다람쥐는 서둘러 짝짓기를 하고 저 아래 도심의 처녀총각들도 가슴이 마구 울렁거리는 설렘의 계절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달래와 산벚꽃과 돌복숭아꽃이 마치 <반 고흐>가 그린 유화처럼 무르녹다 어느 날엔 쇠라가 그린 <점묘(點描)화>처럼 안개 속에 스멀거리다 이어 모네나 세잔의 후기인상파의 그림처럼 번져가다 마침내 가장 한국적인 외로움의 화가 <이중섭이>나 <장욱진>의 그림처럼 무단히 서러움과 그리움이 뚝뚝 떨어지는 그런 산기슭을 본적이 있는지요?
 
제 생각에 부산에서 산다면 부산에서 산다는 그 자체로 가장 풍부하고 화려한 미술적, 색채적 호사를 누린다고 하겠습니다. 사철 꽃이 피는 따뜻한 항구, 남항에 봄이 오면 부산의 가장 너르고 은은한 골짝 대신공원 뒤 오목한 산비탈엔 일제가 수원함양림으로 심은 오래 묵은 삼(杉)나무, 편백과 측백, 토착 곰솔의 푸른색을 바탕으로 진달래와 산벚꽃, 돌복숭아꽃이 어우러져 무르녹기 시작하는데 굳이 대신동 도심이 아니라도 영도다리나 자갈치 바닷가에서 그 화려한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공동어시장의 생선을 어판장에 부릴 때(수많은 갈매기 떼가 한 움큼의 팝콘이 터지듯 날아올라 꽃잎처럼 낙화(落花)로 낙하(落下)하는 참으로 보기 드문 절경)의 남부민동 방파제와 붉고 흰 두 등불이 마주 보는 남항등대 아래에서나 천마산에서 바라보는 그 눈부시게 무르녹아 번져가는 빛의 조화와 마술(魔術)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마침내  선경을 거니는 착각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구덕산 아래인 부산서구청에 근무하며 동장으로, 문화관광과장으로 열심히 일을 하기도 하고 정치꾼 구청장에게 버림을 받아 말도 못하게 피폐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래도 해마다 그 눈부신 빛의 향연(饗宴)을 볼 수 있어 견딜 만하다, 견딜 수 있다고 자위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봄꽃이 이운 4월 말, 5월 초에는 화려한 꽃잎에 무대를 내어주었던 나뭇잎들이 봄비에 말갛게 세수를 하고 연두빛 새순을 내밀어 색다른 투명함과 포근함을 연출하는데 주로 5월에 닥치는 어린이날(부처님 오신 날도 대게 그 때쯤임) 어름에는 미당 서정주의 시에 <초록이 지치어 단풍드는 데>처럼 <연두 빛 익어서 신록이 되어> 이제 막 입영을 앞둔 장정의 면도자국처럼 푸르고 싱싱하기가 이루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집 밖에서 본 명촌별서
집 밖에서 본 명촌별서

마침 그 때의 야산에는 드문드문 하얀 아카시아가 피고 뻐꾸기가 울어 부처님 오신 날 관할의 대원사나, 천룡사를 방문하면 정말 여기가 선경인 듯 부처님이 태어난 룸비니동산(鹿野苑)이 아닌가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여러분, 굳이 복사꽃 만발한 무릉도원은 아니더라도 신선처럼 곱게 늙은 학수동안(鶴首童顏)의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동자(童子)가 선약(仙藥)을 끓이는 동양적 선계가 어느 계절의 산속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천지가 하얗게 눈에 덮이고 계곡의 폭포가 얼어붙은 한 겨울도 좋지만 그건 선경(仙境)이기보다 단순한 설경(雪景)이며 또 백화난만의 4월 말의 봄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5, 6월의 풋풋한 신록이야말로 선경의 입구로 가장 알맞은 계절로 생각됩니다.

이득수 시인

그 밖에도 만산홍엽의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도 있어 하나의 산은 적어도 1년에 대여섯 번 색다른 경치와 정취를 우리에게 선물하는데 제 이야기는 여기에서 전진을 멈춥니다. 애초 목적이 신록이 우거진 어느 산골의 조그만 오두막을 소개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래 사진 첫 번째는 우리 집 잔디밭에서 신록이 무르녹는 앞산을 찍은 것이고 두 번째는 지방도에서 신록에 파묻힌 마초네 집 <명촌별서(別墅) 오른쪽 뒷면의 조그만 집>를 찍은 것입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크게 이룬 것 없이 어느새 생로병사의 뒤안길, 노쇠와 항암의 깊은 심연에서 허덕이지만 좀체 죽지 않은 몽상가로 여전히 공상에 빠진 이 백두옹(白頭翁)을 위해 맘씨 곱고 솜씨 좋은 아내가 오늘도 찌개를 끓이고 충견 마초가 매일 밀착경호를 해주는 집, 아무 부족함이 없는 낙원에서 이렇게 행복을 누려도 되는 것인지, 얼마를 더 살지는 몰라도 이만하면 오늘도 참 행복한 하루를 보낸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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