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인도소식 짠짠짠6-소공녀(小公女)의 첫 사랑

포토 에세이 통산 1016호(2020.6.27)

이득수 승인 2020.06.26 15:32 | 최종 수정 2020.06.26 15:55 의견 0
휴대폰 삼매경에 빠진 아이들과 할배
휴대폰 삼매경에 빠진 아이들과 할배

토정비결(土亭秘訣)에 보면 장중농주(掌中弄珠)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손바닥 위의 구슬을 놀린다는 이 말은 언뜻 부잣집 마나님이  보석과 노리개를 노리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여기서 구슬(珠)은 아기, 손바닥(掌)은 할아버지를 뜻해 유복한 노인이 손주를 어르는 기쁨을 노후의 복중에 으뜸으로 친 데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잠시라도 가만있지 못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3세를 챙기는 일은 누구도 주지 못할 최상의 기쁨이긴 하지만 몹시도 성가시고 힘든 고역입니다. 그 중에 유독 손녀를 좋아하면서도 금방 피로해져 쩔쩔 매는 저 같은 사람에겐 그야말로 독이 든 성배(聖杯)와 같아 한참을 어울리다 보면 금방 녹초가 되어 쓰러집니다. 

게다가 두 내외가 살던 공간을 저들이 온통 차지하고 뛰어노는 바람에 서재도, 소파도, TV도 다 뺏기고 그 때 그 때 적당한 구석을 찾아 웅크리며 숨을 돌려야 합니다. 그렇게 뛰고 굴리고 놀다가 어느 순간 그야말로 양가의 규수답게 다소곳이 둘러 앉아 그림을 그리고 글짓기를 하는데  요즘 아이들은 만화그리기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어제 오전은 모처럼 인도에서 온 두 아이들이 만화그리기 삼매경이라 혼자 작은 방에서 눈을 좀 붙이고 거실로 나오니 점심 때 제 생일회식이 있다고 미리 온 외손녀까지 각자 휴대폰을 들고 삼매경에 빠진 새 손녀 틈에 저까지 끼어들어 멋진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어 아이들이 그 새 그린 그림으로 거실 벽에 작은 전시회도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내의 자동차로 저와 세 아이가 식당을 향하는 차안이었습니다. 장난기가 동한 할배가 주책도 없이 
“얘들아, 혹시 너희들 벌써부터 남자친구가 생긴 것 아니야?” 하는 순간
“예. 있어요!”
셋이 동시에 소리치는 지라 깜짝 놀라
“그래 정말이야?” 하자
“예. 할아버지. 저는 시우를 좋아해요.”
너무 천진해 도저히 거짓말을 못하는 8세 외손녀 현서의 말에 이어
“저는 인도남자 아만이란 악당이 자꾸 따라다녀요.”
8세 친손녀 가화도 나서고
“저는 인도남자 아이린이란 아이가 있긴 한데...”
7세 우화도 전혀 망설임 없이 술술 부는 것이었습니다.

휴대폰 삼매경에 빠진 아이들과 할배
 아파트 거실 벽에 급조한 전시회

“그래. 그럼 한 사람씩 자세히 말해 봐. 먼저 우리 우화부터.” 하자 만 7세 우화가
“노는 시간이나 축제 때 꼭 저 옆에 붙어다니는 아이린이란 순수한 남자사람친구가 있어요.”
“남자사람친구라니?”
“남자이긴하지만 이성친구는 아니라는 말이지요.”
“호오, 그래? 그럼 현서는?”
“저는 같은 유치원 출신 시우를 좋아하는데 그 애도 저를 좋아하면서도 손을 잡으려면 슬슬 빼고 도망가요.” 하는 순간
“현서야, 그런 걸 짝사랑이라고 하는 거야.”
가화가 단정짓 듯 말하고는
“인도에 가서 처음에는 집에서 울면 엄마아빠가 속상할 것 같고 학교에 가서는 선생님이랑 친구들이 놀릴까 봐 몰래 화장실에 가서 사흘을 울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울고 나올 때 저 멀리서 시꺼먼 인도남자아이 아만이 절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언니, 많이 검어?”
“아니 적당히 보기 좋게 검어. 그렇지만 나는 그 애가 만화영화 속에 나오는 악당 같단 말이야.”
“그래서?”
이번엔 제가 바짝 긴장하는데
“그 애가 다른 한국남자아이에게 한국어를 배워 <이 가화>라고 쓰고 옆에 커다란 파란색 하트를 한 그려 내 책상에 얹어놓았어요.”
“그래서?”
“아무 이야기도 안 하고 가만 놓아두었어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주 크고 정성이 많이 들어간 파란색 하트를 그려 내 사물함 안에 넣어놓았어요.”
“그럼 받아주지. 가화야. 그 애가 섭섭하잖아?” 현서의 애처로운 눈길에
“몰라. 난 그 애가 꼭 만화 속의 악당 같단 말이야.”
하는 순간 푸후후, 아내와 저의 웃음이 동시에 터지고 말았습니다. 

커피숍의 테이블 하나를 당당히 차지한 네 손녀들.
커피숍의 테이블 하나를 당당히 차지한 네 손녀들.

(요 발칙한 것들, 그래서 에로부터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 하였구나!)
하면서도 우리 내외의 입가에선 끝내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제 생일잔치는 코로나19 여파로 처남이랑 동서들 사업도 부진하고 저도 몸이 아프고 장모님도 점점 기억력이 없어져 분위기가 도무지 살지 않았는데 아내가 세 공주의 남자친구이야기를 꺼내자 마침내 얼굴들이 펴지기 시작했습니다. 손자라고는 딸만 넷이라 딸딸딸딸, <다 떨어진 슬리퍼할배>라고 아쉽기 그지없던 저도 모처럼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렇지, 언젠가는 내 작은 눈을 닮았지만 감성이 좋고 외로움을 잘 타는 아이들이 부산과 한국은 물론 온 세상에 가득하겠구나!)

아직도 조금 남은 손자에 대한 꿈을 이젠 완전히 접기로 했습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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