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김삿갓, 제 이름을 숨기려고

포토 에세이 통산 1017호(2020.6.28)

이득수 승인 2020.06.27 14:19 | 최종 수정 2020.06.27 14:59 의견 0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에 세워진 김삿갓 기념 조형물. [Korea.net / Korean Culture and Information Service / CC BY-SA /2.0]

고루한 명분의 주자학의 폐해가 극에 달한 19세기의 조선말 <방랑시인 김삿갓>이란 천재시인이 나타났습니다. 본명이 김병연인 그는 본래 시를 읊으며 천지를 떠돌 낭만적인 한량이 아니었습니다. 평안도 선천군수를 지낸 김익순의 손자인 그는 신라왕족의 후예였지만 그의 조부가 홍경래난이 발발하자 반란군에 투항한 죄로 난이 평정되자 멸문지화를 당하는 바람에 한 노복(奴僕, 종)에 의해 그의 어미와 함께 낯선 곳을 떠돌며 숨어서 성장했습니다.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마침 과거가 있어 그는 <논 정가산 충절사 탄 김익순죄 통우천>이란 제목의 시(詩), 그러니까 <정가산이 충절을 지켜 순국함을 논하고 김익순이 반란군에 투항한 하늘을 찌르는 죄를 통탄함>이란 명문으로 단숨에 장원급제를 합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어미로부터 과거답안의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임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과 함께 곧바로 가출, 할아비를 욕하여 천륜을 버렸으니 다시는 하늘을 볼 수 없다며 삿갓을 쓰고 다니며 이름마저도 삿갓 립(笠)자의 김립(金笠)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핏줄(血肉)이라는 명분에 죄 없는 한 천재가 망가지고 만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일은 과연 그가 다시 하늘을 보지 못할 만큼 큰 죄를 지은 건지, 아니면 어려서부터 낯선 곳을 떠돌며 조상에 대해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할아버지의 죄를 탄핵한 것이 무지로 인한 부득이한 일일진대 과연 그렇게 삶을 송두리째 포기할 만한 죄인지, 혹시 삼강오륜과 천륜이라는 고루한 유교적 사고방식 때문에 아무런 융통성이 없는 최악의 선택, 그러니까 노모와 처자식을 유기하는 또 하나의 천륜을 범한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그렇게 떠난 그는 너무나 고된 방랑에 지쳐 1년 뒤 조용히 귀가하였으나 차남을 잉태시킨 후 다시 집을 떠나 천지간을 떠돌며 유교적 폐습에 젖은 나라와 인심, 고루한 양반을 조롱하는 저항적인 시를 쓰며 속절없이 늙어갑니다. 그러기를 수십 년, 둘째 아들이 천신만고 끝에 자신을 찾아와도 아들이 잠든 새 다시 잠적해버리다 예순이 다된 나이에 길 위에 쓰러져 남의 집에서 객사(客死)하고 마는 것입니다.

김삿갓 동상과 시비. [영월군청 홈페이지]
김삿갓 동상과 시비. [영월군청 홈페이지]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명국환이 부른 <방랑시인 김삿갓>을 흥얼거리며 그 난감한 생애를 살다간 김병연을 아주 낭만적이고 유유자적한 한량 내지 신선으로 미화하며 많은 사내들의 로망으로 삼고 있습니다. 한 사내로 태어나 노모를 모시고 처자식을 거느려야하는 그 모든 소임과 대장부의 호연지기를 다 팽개치고 단지 장원급제자 김병연이라는 이름을 아끼려, 역적의 손자로서 할아비를 욕한 패륜아임을 숨기려 천지강산을 떠돈 도피의 인물이 과연 그렇게 만인이 부러워할 인물이나 삶이 되는 것일까요?

심지어 정권탈취를 위해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어느 위정자도 평소 18번으로 <방랑시인 김삿갓>을 열창하고 그의 추종자들이 열광하니 말입니다. 우리가 좀 더 깊이 김병연의 삶에 천착(穿鑿)한다면 김삿갓의 삶은 당연히 너무나 경직되고 비능률적인 조선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죄 없이 희생된 한 선비의 난감한 생애와 그 인간적 고뇌가 떠올라야 할 텐데 <방랑시인 김삿갓>의 가사에는 그런 쇠락한 왕조와 고뇌하는 지성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이 김삿갓의 여러 면모 중에 단 한 가지, 단지 자유롭게 천지를 떠돈 그 <방랑>만을 부각시켜 전쟁과 가난과 악습에 억눌리던 분단국 사내들의 막연한 탈출구로서 아전인수식으로 오용(誤用)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뛰어난 선비이자 문재가 번뜩이는 장원급제자 김병연은 자기도 모르게 할아버지를 규탄한 죄(이 경우가 미필적 고의가 아닌지?)로 장원급제에 따른 모든 영예와 벼슬살이를 버린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노모와 처자식을 다 저버린 하나의 죄인이자 은둔자, 멋모르고 인륜을 범한 비겁한 도피자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숨기려고 그러므로 또 하나의 자아랄까 자신을 찾기 위해 끝없는 방황의 노정(路程)과 그렇게 쓰여진 시의 내용에 대하여 다음 회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우선 <방랑시인 김삿갓>의 가사를 올립니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 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 잔에 시 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세상이 싫던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 없는 이 거리 저 마을로
손을 젓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방랑에 지치었나 사랑에 지치었나
개나리 봇짐지고 가는 곳이 어데냐
팔도강산 타향살이 몇몇 해던가
석양지는 산마루에 잠을 자는 김삿갓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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