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일흔 살의 뜨락에도 청춘(靑春)은 간다

포토 에세이 통산 2018호(2020.6.29)

이득수 승인 2020.06.28 21:10 | 최종 수정 2020.06.29 09:47 의견 0
창포

보랏빛 창포 머리 감은 날 일흔 살의 사내도 가슴 설렌다. 

어지러운 달리아에 가슴이 붉고
난쟁이 해바라기로 발돋움하듯
채송화 앉은 채로 그리움 타는  
나 어디서 예까지 흘러왔는지,

청(靑) 청(靑) 청(靑) 저 새파란 하늘 깊숙이
구름송이 뭉글뭉글 피어나듯이
나 누구를 골똘히 생각해보는

새가 우는 아침 답, 꽃 버는 한낮,
꿈길처럼 아스라한 기억 더듬어
나 또 다시 열일곱 되는

수국
해바라기
채송화
패랭이꽃

(그래. 달리아, 접시꽃, 수련(睡蓮)과 보리수, 요즘 꽃과 열매는 모두 단색이 아닌 무지갯빛으로 날 현혹시키는 걸까? 날 세상에 처음 눈 뜨던 다섯 살로 데려가려는 걸까...)

 가난했던 내 유년도 잊어버리고
 외로웠던 내 소년 적 떨쳐버리고
 어지럽던 내 젊음과 설익은 사랑
 그 허망한 이별마저 털어버리면

나 일흔 살 노인 아니야
말기암환자는 더욱 아니야 
저 많은 꽃송이가 어찌 예쁜지
벌떼와 노랑나비 왜 정다운지
이제 눈 감고도 모두 느끼는
나이만큼 성숙한 이끼 낀 바위
나 한 마리 새가 되어 숨 쉬는 뜨락

보리수
접시꽃
으아리
석류

(나 백두옹(白頭翁) 되어도 장자(莊子)는 아니야. 죽은 아내가 나비가 되는 호접몽(胡蝶夢) 따위는 꾸지 않을 거야. 난 아직도 빗소리를 듣고 무지개를 바라보는 소년(少年)으로 남을 거야. 노을보다 더 찬란한  여명(黎明)을 기다릴 거야, 들꽃들의 개화(開花)를 관찰할 거야.)

그래, 그랬었지. 젊었을 적엔
날마다 가슴 뛰는 사랑도 하고
때로는 이별하고 절망도 하고
밤마다 술에 젖어 절규를 해도
청춘이란 길이만큼 필름이 되어 
흑백영화(映畫)처럼 감미로웠지.

나 다시 또 누군가 그리워하며
한나절쯤 골똘히 편지를 쓸까?
때 묻은 수첩을 뒤져가면서
오래 된 친구에게 전화를 걸까?

 조금씩 볕이 달아 후끈거리자
 잠들었던 수련이 눈 뜨는 정오
 새야 울어라, 꽃아 또 피라.
 스물한 살 청년처럼 맥박이 뛰는
 일흔 살의 뜨락에도 청춘은 간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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