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절세미인 메꽃

포토 에세이 통산 1010호(2020.6.21)

이득수 승인 2020.06.20 12:39 | 최종 수정 2020.06.20 13:04 의견 0

 

너무나 아름다운 메꽃과 꽃의 바다 200530
너무나 아름다운 메꽃(200530)

정염(情炎)으로 불타오르는 장미는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꽃의 여왕으로, 그 장미가 피는 5월까지 '계절의 여왕'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붉고, 희고, 누르고 심지어 검은 장미까지 그 아름다운 꽃송이 하나하나가 바로 정염(情炎)이며 에로티시즘인 것입니다. 그래서 수줍은 총각이 '장미 100송이의 꽃다발'로 고백을 한다든지 장미꽃잎을 향수나 화장품의 원료로 채취하는 등 사랑과 정열을 상징함에는 그만한 게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야생화 중에서 장미에 필적할 만한 꽃이 여럿 있다고 생각해 꽃을 보는 눈까지 촌티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선 산야를 온통 덮어가는 바탕색이자 이 땅의 혼으로 불릴만한 진달래와 찔레꽃이 결코 장미에 뒤지지 않으며 삼백리 한려수도를 불태우는 새빨간 동백꽃의 연연한 그리움도 결코 장미에 뒤지지 않습니다. 또 늦은 봄에서 이른 여름까지 지나가는 사람의 눈이 확 뜨이게 할 만큼 청초한 산나리 꽃, 늦가을의 외진 산속에만 피는 신비한 보랏빛 꽃 '용담', 또 가을 산의 프리마돈나 '쑥부쟁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온 천지를 가득채운 화려한 서양의 꽃 장미에 대적해 이름조차 잘 않은 저 수수한 메꽃(사진)을 감히 동양의 대표로, 야생화의 대표로 추천해봅니다.  

제 또래의 시골 출신들은 저 모미싹꽃을 보면 아름답다거나 그립다는 생각보다는 우선 배고픔과 보릿고개를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칡이나 쑥, 송기나 찔레로 허기를 달래던 보릿고개의 5월초쯤 저 연연(娟娟)한 보라색의 메꽃이 피면 비로소 물이 잡히기 시작하는 보리이삭을 절구에 찧어 보얗고 찐득찐득한 진액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 걸 '풋바심'이라하여 덩이째 떼어먹거나 죽을 끓일 수 있으면 비로소 굶어죽을 걱정을 덜게 되어 오래 굶은 어미의 젖이 잘 안 나오던 아이나 병든 노인이 한 해를 더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늘 굶주리던 아이들이 따먹던 이른 봄의 버들강아지나 참꽃, 찔레, 삘기, 꿀 풀, 뱀 딸기 등은 우선 흔하고 독이 없어 먹을 수는 있는데 대부분 밍밍한 물맛이며 녹말성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가 부르기는커녕 이빨사이에 낄 것도 없어 과히 '입에 풀칠'이나 '간에 기별'도 안 가 시장기를 벗어나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저 아름다운 메꽃은 호미나 손으로 뿌리 부분을 살살 파면 지금의 생라면 정도 굵기의 하얀 뿌리가 서너 줄, 한 30, 40쯤 캘 수 있어 그걸 삶아 먹으면 맛도 달달할 뿐 아니라 약간의 녹말성분이 들어있어 잠깐이나마 허기를 달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꺼번에 너무 많이 아프면 배탈이 나기도 해서 많이 먹거나 자주 먹지는 못했지만 보릿고개의 구황식물(救荒植物, 흉년을 견디는 양식거리 식물)로 그만한 게 없었습니다.

이윽고 길가의 보리이삭만 따서 껌처럼 질겅질겅 씹어도 어느 정도 허기를 면할 5월 중·하순이 되면 저 아름다운 분홍빛 꽃이 절정에 달하는데 6월 초쯤 보리를 베고 밭을 갈아엎으면 저 메꽃이 피어있는 밭둑어름에 숨어사는 논두럼아재비(땅강아지)가 번번이 쟁깃날에 허리가 동강나 허연 체약을 쏟고 죽어나자빠지는데 그걸 먹기 위해 종달새나 직박구리가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니고 심지어 해오라기까지 겅중겅중 뛰었습니다.  

후투티 수컷의 윤곽사진(전봇대 윗부분을 자세히 보아야함)-190611
멀리서 포착한 후투티 수컷(전봇대 윗부분 왼쪽, 190611). 오른쪽 아래는 사진 전문 사이트 픽사베이에 실린 후투티.

그런데 제가 성인이 되어 알기로 우리나라를 찾는 여름철새 중 에 가장 아름다운 화관(花冠)을 가진 후투티라는 새가 그 땅강아지를 주식으로 새끼를 낳아 키워 여름이 지나면 다시 강남으로 떠난다고 합니다. 조류학자처럼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탐조활동을 하지 않으면 후투티는 이웃에서 봄여름을 같이 보내면서도 보통사람들은 일생에 한 번도 구경하기가 힘든 '은둔의 새'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명촌리 일대는 그 모미싹이 많아서 그런지 모미싹 뿌리에 숨어사는 땅강아지를 잡기 위해 아름다운 화관에 비해 기형적으로 길게 휘어진 부리를 가진 수컷 후투티가 흔히 목격되며 우리 집 화단에도 암컷들이 가끔 찾아옵니다. 후투티는 사람을 매우 꺼려 탐조가나 사진작가들이 온전한 사진 한 장을 찍기가 일생의 과제가 될 정도로 어렵다고 하는데 저는 후투티 수컷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그러다 재작년엔 그 후투티가 대규모로 닭을 키우다 묵혀둔 '명촌농장'의 관리 동(棟) 뒤 밤나무에 둥지를 튼 것까지 발견했는데 작년에는 그 귀한 후투티가 우리 밭이나 화단에 앉는 것은 물론 집 뒤의 대밭에서 우리 밭을 거쳐 집 앞의 세 그루 감나무에까지 자주 출몰해 살펴보니 놀랍게도 불과 50m쯤 떨어진 대밭 뒤의 밤나무에 둥지를 튼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잘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둥지를 다소 떨어진 곳으로 옮긴 것 같습니다. 저도 그 후투티의 사진을 찍어보려고 여러 번 시도해보았습니다만 화단이나 밭에 앉은 새를 발견하고 휴대폰을 꺼내들기 무섭게 날아가 버려 도무지 한 번도 찍을 수 없었는데 딱 한번 좀 멀리 떨어져서 벚나무에 앉은 수컷 후투티의 윤곽을 찍을 수 있어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지만 지금도 많이 아쉽습니다.

이득수 시인

그런데 말입니다. 저 아름다운 메꽃으로도 부족한지 사람들은 왜 짝퉁 메꽃인 저 '서양 달맞이꽃'을 들여왔는지? 이 땅에는 한여름 해가 질 무렵이 되면 미치 발돋움하듯 길게 목을 뺀 달맞이꽃이 야산과 언덕을 노란 꽃송이로 가득 채워 '달맞이꽃 기름'이 건강식품으로 개발되기까지 했는데 이름은 달맞이꽃을 모양은 메꽃을 닮은 서양 꽃을 굳이 수입하고 그걸 또 제 아내는 가뜩이나 좁은 우리 집 화단에 채우다니 말입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메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장미에서 보릿고개로 또 후투티와 서양달맞이꽃에 이르기까지 이야기가 너무 옆길로 새어 많이 산만합니다. 연결고리를 찾아 잘 구성하면 좋으련만 그게 다 식소사번(食少事煩)일 터, 제 포토 에세이 자체가 게(蟹)가 옆 걸음 치듯 자유로운 산보(散步)인 만큼 오늘은 흐트러진 모습 그대로 가겠습니다. 해량(海諒) 바랍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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