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염(情炎)으로 불타오르는 장미는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꽃의 여왕으로, 그 장미가 피는 5월까지 '계절의 여왕'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붉고, 희고, 누르고 심지어 검은 장미까지 그 아름다운 꽃송이 하나하나가 바로 정염(情炎)이며 에로티시즘인 것입니다. 그래서 수줍은 총각이 '장미 100송이의 꽃다발'로 고백을 한다든지 장미꽃잎을 향수나 화장품의 원료로 채취하는 등 사랑과 정열을 상징함에는 그만한 게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야생화 중에서 장미에 필적할 만한 꽃이 여럿 있다고 생각해 꽃을 보는 눈까지 촌티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선 산야를 온통 덮어가는 바탕색이자 이 땅의 혼으로 불릴만한 진달래와 찔레꽃이 결코 장미에 뒤지지 않으며 삼백리 한려수도를 불태우는 새빨간 동백꽃의 연연한 그리움도 결코 장미에 뒤지지 않습니다. 또 늦은 봄에서 이른 여름까지 지나가는 사람의 눈이 확 뜨이게 할 만큼 청초한 산나리 꽃, 늦가을의 외진 산속에만 피는 신비한 보랏빛 꽃 '용담', 또 가을 산의 프리마돈나 '쑥부쟁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온 천지를 가득채운 화려한 서양의 꽃 장미에 대적해 이름조차 잘 않은 저 수수한 메꽃(사진)을 감히 동양의 대표로, 야생화의 대표로 추천해봅니다.
제 또래의 시골 출신들은 저 모미싹꽃을 보면 아름답다거나 그립다는 생각보다는 우선 배고픔과 보릿고개를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칡이나 쑥, 송기나 찔레로 허기를 달래던 보릿고개의 5월초쯤 저 연연(娟娟)한 보라색의 메꽃이 피면 비로소 물이 잡히기 시작하는 보리이삭을 절구에 찧어 보얗고 찐득찐득한 진액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 걸 '풋바심'이라하여 덩이째 떼어먹거나 죽을 끓일 수 있으면 비로소 굶어죽을 걱정을 덜게 되어 오래 굶은 어미의 젖이 잘 안 나오던 아이나 병든 노인이 한 해를 더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늘 굶주리던 아이들이 따먹던 이른 봄의 버들강아지나 참꽃, 찔레, 삘기, 꿀 풀, 뱀 딸기 등은 우선 흔하고 독이 없어 먹을 수는 있는데 대부분 밍밍한 물맛이며 녹말성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가 부르기는커녕 이빨사이에 낄 것도 없어 과히 '입에 풀칠'이나 '간에 기별'도 안 가 시장기를 벗어나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저 아름다운 메꽃은 호미나 손으로 뿌리 부분을 살살 파면 지금의 생라면 정도 굵기의 하얀 뿌리가 서너 줄, 한 30, 40쯤 캘 수 있어 그걸 삶아 먹으면 맛도 달달할 뿐 아니라 약간의 녹말성분이 들어있어 잠깐이나마 허기를 달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꺼번에 너무 많이 아프면 배탈이 나기도 해서 많이 먹거나 자주 먹지는 못했지만 보릿고개의 구황식물(救荒植物, 흉년을 견디는 양식거리 식물)로 그만한 게 없었습니다.
이윽고 길가의 보리이삭만 따서 껌처럼 질겅질겅 씹어도 어느 정도 허기를 면할 5월 중·하순이 되면 저 아름다운 분홍빛 꽃이 절정에 달하는데 6월 초쯤 보리를 베고 밭을 갈아엎으면 저 메꽃이 피어있는 밭둑어름에 숨어사는 논두럼아재비(땅강아지)가 번번이 쟁깃날에 허리가 동강나 허연 체약을 쏟고 죽어나자빠지는데 그걸 먹기 위해 종달새나 직박구리가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니고 심지어 해오라기까지 겅중겅중 뛰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인이 되어 알기로 우리나라를 찾는 여름철새 중 에 가장 아름다운 화관(花冠)을 가진 후투티라는 새가 그 땅강아지를 주식으로 새끼를 낳아 키워 여름이 지나면 다시 강남으로 떠난다고 합니다. 조류학자처럼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탐조활동을 하지 않으면 후투티는 이웃에서 봄여름을 같이 보내면서도 보통사람들은 일생에 한 번도 구경하기가 힘든 '은둔의 새'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명촌리 일대는 그 모미싹이 많아서 그런지 모미싹 뿌리에 숨어사는 땅강아지를 잡기 위해 아름다운 화관에 비해 기형적으로 길게 휘어진 부리를 가진 수컷 후투티가 흔히 목격되며 우리 집 화단에도 암컷들이 가끔 찾아옵니다. 후투티는 사람을 매우 꺼려 탐조가나 사진작가들이 온전한 사진 한 장을 찍기가 일생의 과제가 될 정도로 어렵다고 하는데 저는 후투티 수컷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그러다 재작년엔 그 후투티가 대규모로 닭을 키우다 묵혀둔 '명촌농장'의 관리 동(棟) 뒤 밤나무에 둥지를 튼 것까지 발견했는데 작년에는 그 귀한 후투티가 우리 밭이나 화단에 앉는 것은 물론 집 뒤의 대밭에서 우리 밭을 거쳐 집 앞의 세 그루 감나무에까지 자주 출몰해 살펴보니 놀랍게도 불과 50m쯤 떨어진 대밭 뒤의 밤나무에 둥지를 튼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잘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둥지를 다소 떨어진 곳으로 옮긴 것 같습니다. 저도 그 후투티의 사진을 찍어보려고 여러 번 시도해보았습니다만 화단이나 밭에 앉은 새를 발견하고 휴대폰을 꺼내들기 무섭게 날아가 버려 도무지 한 번도 찍을 수 없었는데 딱 한번 좀 멀리 떨어져서 벚나무에 앉은 수컷 후투티의 윤곽을 찍을 수 있어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지만 지금도 많이 아쉽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 아름다운 메꽃으로도 부족한지 사람들은 왜 짝퉁 메꽃인 저 '서양 달맞이꽃'을 들여왔는지? 이 땅에는 한여름 해가 질 무렵이 되면 미치 발돋움하듯 길게 목을 뺀 달맞이꽃이 야산과 언덕을 노란 꽃송이로 가득 채워 '달맞이꽃 기름'이 건강식품으로 개발되기까지 했는데 이름은 달맞이꽃을 모양은 메꽃을 닮은 서양 꽃을 굳이 수입하고 그걸 또 제 아내는 가뜩이나 좁은 우리 집 화단에 채우다니 말입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메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장미에서 보릿고개로 또 후투티와 서양달맞이꽃에 이르기까지 이야기가 너무 옆길로 새어 많이 산만합니다. 연결고리를 찾아 잘 구성하면 좋으련만 그게 다 식소사번(食少事煩)일 터, 제 포토 에세이 자체가 게(蟹)가 옆 걸음 치듯 자유로운 산보(散步)인 만큼 오늘은 흐트러진 모습 그대로 가겠습니다. 해량(海諒) 바랍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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