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뭐야, 고추가 바지를 벗는다고?

포토 에세이 통산 제1025호(2020.7.6)

이득수 승인 2020.07.04 16:32 | 최종 수정 2020.07.05 10:58 의견 0
석류꽃과 바지를 벗는(꽃이 떨어지면서 열매가 막 생겨나는 시점) 석류(가운데). 

우리 어린 시절 1년 중 가장 바쁜 모내기를 끝낸 7월 초, 마을의 부녀자들은 아침부터 진장이라는 나지막한 산등성이의 밭에 올라가 콩밭을 매고 열무를 솎았습니다. 그러다 초여름의 볕이 달기 시작하는 10시쯤 머리에 쓴 수건을 벗어 땀을 씻으며 과수원 옆 소나무그늘로 모였습니다.

“올해 감자 농사는 어때?”
“흰 감자는 좋은데 자주감자는 별로야.”
“꼬치는?”
“아, 우리 꼬치는 한창 주우를 벗고 있던데.”
“뭐, 꼬치가 주봉을 벗는다고?”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 깔깔 웃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신혼인 둘째 누님을 따라간 여섯 살의 저는  
(꼬치가 주를 벗는다고 고추가...)
저도 몰래 벌쭉 웃는데
(아이구, 우리 대름 좀 봐라. 벌써 무슨 말인지 아는가베.) 
괜히 멋적게 웃는 사촌형수와 6촌 누님과 우리 누님이 차례로 제 머리를 쓸어주며
“아이들 보는데 찬물도 못 묵는다 카디마는...”
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습니다. 

막 바지를 벗고 고추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고추나무.

(그래. 고추가 주(바지)를 벗다니, 그렇다면 남자가 바지를 벗는다 말이고...)
당시 가끔은 누님의 신혼방에서 억지로 자는 척한 경험이 있는 저도 그게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짐작해보는데 이내
“허서방네 너거 집 꼬치도 참 굵고 실하네?”
“아, 그거사 우리 신랑이 본래 좀 크고 실하지. 그런데 새이 너거 꼬치도 장난이 아니네. 우리 형부가 코만 큰 기 아인가 봐.”
“그러나? 우리 집 꼬치도 좋아 보이나?”
하며 또 깔깔 웃었습니다. 무려 60년도 더 된 호랑이가 담배를 먹던 시절,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는 없던 시절에 여염의 아낙들끼리 그 정도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거의 19금(禁)의 내용인 것입니다.

자, 아래의 사진을 좀 보십시오. 갓 핀 하얀 고추 꽃 옆에 분홍빛으로 말라가는 고추 꽃과 그 옆에 완전히 말라서 금방 떨어질 것 같은 조글조글한 고추 꽃도 보일 것입니다. 그렇게 고추 꽃이 떨어지면서 밑에 달린 조그만 초록색 고추의 끝이 빠져나오는 것을 고추가 주(바지)를 벗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다 깬 사내아이의 고추를 연상할 수도 있는 그 모습에서 4촌이나 6촌의 언니동생, 시누이와 올케가 모여 이야기할 때는 나름 상당히 에로틱한 실마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모처럼 텃밭에 나가 오이와 가지 곁순을 따다 문득 농촌아낙들이 아니면 거의 쓰지도 않던 이 <꼬치가 주를 벗는다.>라는 묘한 말이 생각나는 순간
(그렇지. 고추가 바지를 벗는다면 오이나 가지는 엄청 더 큰 바지를 벗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고추도...)
하는 생각에 가지 꽃을 유심히 살펴보니 역시나 고추 꽃과보다 훨씬 큰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고추보다 훨씬 거대하고 섹시한 거시기가 매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구나! 동물의 번식에만 페르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식물의 결실에도 엄청난 에로티시즘이 있구나!

바지를 벗는 가지나무.

나이 일흔이 넘어 머리가 허옇게 세고 병이 들어 이제 바지를 벗든 무얼 하든 에로티시즘과 완전히 멀어진 이 나이에야 비로소 생명의 신비, 생산의 신비를 깨닫는구나.)
하면서 주변의 작물들을 살피는데 가늘고 긴 열매 끝에 노란 꽃을 매단 오이 역시 고추처럼 <주를 벗고> 있었고 그 옆의 토마토는 동그랗고 도도록한 열매 위에 마른 꽃잎이 돌돌 말려 떨어지는 것이 고추가 바지를 벗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 화촉동방의 신부가 이제 막 족두리를 풀고 속적삼의 옷고름을 푸는 순간의 살 냄새에 땀 냄새까지 연상되는 한 단계 더 위의 에로티시즘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밭둑에 빙긋이 웃고 선 반시 감의 동그란 열매도 역시 그 비슷한 분위기로 꽃잎이 지고...

그러다 울타리에 핀 주황빛 석류꽃에 눈이 가 사진을 찍는 순간 그만 저는 대경실색하고 말았습니다. 알고 보니 석류열매도 바지를 벗으며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분홍빛 석류꽃이 떨어진 자리에 동그란 석류가 맺히면서 다시 동그랗고 납작한 주황빛 꽃(석류는 아마도 꽃이 겉과 속 2중인 것 같음)이 너무나 선연하게 애로티시즘을 연출, 처음 왕의 부름을 받은 조선의 궁녀가 오후 내내 목욕을 한 뒤 구중궁궐 그윽한 침소에서 왕을 맞아 바야흐로 속곳을 벗는 그런 모습인 것입니다. 여성독자분께 양해를 구합니다.

이득수 시인

그렇습니다. 자세히만 살피면 이 세상은 어디든지 모두 사랑의 땅이고 이별과 눈물의 땅이듯이 명촌리의 조그만 채전 밭의 6월 아침도 바야흐로 온갖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사랑의 땅, 에로티시즘의 땅이었습니다. 

이제 볕이 조금만 달면 나비가 날아와 꿀을 빨고 저 작고 하얀 고추 꽃은 물론 노란 토마토와 오이꽃, 자주 빛 가지 꽃과 새하얀 옥수수꽃의 송이마다 벌들이 자리 잡고 꿀과 꽃가루를 따느라 뜨락가득 붕붕거리는 소리가 넘칠 것입니다. 바야흐로 가장 빛나는 계절의 축제, 젊음과 생명의 향연을 벌일 것입니다.

이 젊고 싱싱한 생산의 땅에서 저 역시 또 한 번 힘을 내어 한해라도 더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주 벗을 일도 없는 조그만 고추화석이 매달린 헐렁한 바지춤을 단단히 고쳐 매었습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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