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1980년대 시골마을이나 도시의 뒷골목에 있는 이발소에 다닌 사람들은 지금도 한 서너 가지 유형의 이발소 그림이 기억날 것입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그림이 하얗게 눈을 덮어쓴 알프스를 배경으로 온갖 꽃이 피어있는 들판이 펼쳐지고 맨 아래 쪽에는 목동이 사는 마을과 소떼들이 있는 풍경이었지요. 그 때 그림을 유심히 살펴본 사람들은 목동이 사는 빨간 지붕의 기다란 집과 동그랗게 높은 원통위에 뾰족한 지붕이 덮인 목초저장창고 사이로우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푸른 초원과 목장의 이국적 풍경을 부와 낭만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자신은 언제 저런 곳에 가보나, 저렇게 멋지게 살아볼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산이 많기는 하지만 경사가 심해 드넓은 초원이 귀해 대규모 목축이 힘들고 단지 농부들이 농사용의 소 한 두 마리를 키우는 것이 전부였지요. 그래서 좀 오래된 대중가요 박재홍의 <물레방아 도는 내력>의 가사를 보면
벼슬도 싫다마는 영예도 싫어
정든 땅 언덕 위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밭에 나가 지심을 매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새들이 우는 소리 알아보련다.
어디에도 목장이나 초원에 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좀 흘러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어 먹고살기가 나아진 70년대 우리가요계에도 <히식스>라는 보컬그룹이 나타나 <초원의 빛>, <초원의 사랑>이란 노래로 초원이 젊은이들이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추억과 낭만으로 설정되는데 이때는 강원도의 대관령을 비롯한 전국의 넓은 산기슭에 띄엄띄엄 넓은 초원과 목동의 뾰족지붕이 국도를 달리면 흔히 목격되던 시절이 된 것이지요.
거기서 또 한참 세월이 지나면 남진의 <님과 함께>의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의 소박한 포부가 전 국민 특히 젊은이들의 로망이 되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 때 농업고등학교를 다니던 저는 학교에서 가축도 가금(닭, 오리), 중소가축(양, 염소, 돼지), 대가축(소,말)로 세분해서 배웠을 정도였고 주로 외국에서 들어온 사료작물 이탈리안 라이그라스, 오챠드 그라스, 티모시, 컴프리 등을 재배하여 소의 김치 사일리지(엔실리지)를 담는 사일로우를 짓는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발전된 목축으로 우리나라는 지금 우유를 자급하고도 남아 치즈가 나올 정도로 목축업이 발달하고.
그런데 말입니다. 서기 2000년대 전후까지 국도변에서 흔히 발견되던 빨간 원통형의 사일로우가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목축기술이 발전하면서 힘들게 사일로우를 짓고 김치를 담은 것보다 목초를 둥글게 뭉쳐 곤포라는 비닐에 포장하여 공깃돌처럼 여기저기 쌓아놓으면 포장 당시에 뿌려준 요오드성분이 목초를 발효시켜 싱싱하면서도 영양가 많은 사료를 제공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둥근 사료뭉치를 <곤포사일리지>라고 부른답니다.
그래서 말하던 저 푸른 초원에 그림 같은 집이 있는 목장들은 농촌마을마다 공장건물 같은 거대한 축사를 짓고 수십, 수백 마리의 비육우를 입식하여 곤포사일리지의 엔실리지를 먹이는 풍경으로 바뀐 것이지요.
지금 농촌에서 돈을 좀 버는 사람들은 소를 많이 먹이는 사람이고 집 앞에 쌓아놓은 <곤포사일리지>의 더미가 많으면 많을수록 부자로 불립니다. 옛날식이라면 풀방구리나 짚동으로 불렸을 저 <곤포사일리지>가 한때는 초록색으로, 어떤 핸는 분홍빛으로 포장되어 겨울철 농촌풍경을 화사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도시사람이 시골에 오면 맨 처음 목도하는 그 괴상한 공깃돌의 정체를 알고 나면 참 세월이 많이 변했다고 허허 웃습니다.
지금 농촌풍경은 <저 푸른 초원위의 그림 같은 집>과는 거리가 먼 <거대한 축사건물과 곤포사일리지가 점령한 너무나 엉뚱한 풍경>으로 바뀌었습니다.
얼마 전에 귀국한 손녀들이 자동차를 지나다 곤포엔실리지의 더미를 보고 하나가
“야 저 하얀 이빨 좀 보아. 옛날에 여기에는 엄청 큰 공용이 살았나 봐.” 하니
다른 하나가
“맞아. 이빨이 두 개나 썩은 놈도 있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변해도 너무나 변한 것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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