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신작로와 옛날 버스

포토 에세이 통산 1034호(2020.7.16)

이득수 승인 2020.07.14 23:37 | 최종 수정 2020.07.16 01:03 의견 0
사진1. 부산-언양간의 버스가 싱싱 달리던 남천내공굴과 정거장 마을
부산-언양의 버스가 싱싱 달리던 남천내공굴과 정거장 마을.

우리가 자라던 보릿고개시절 시골아이들에게는 하얗게 번쩍이며 신작로를 다녀가는 버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그건 하루하루 먹고살기에도 급급한 시절의 소읍인 언양에서 대도시 부산으로 버스를 타고 부산에 가서 학교나 공장에 다니는 자체가 엄청 출세를 한 일, 촌티를 벗고 수돗물을 먹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국민학교 저학년인 같은 반 친구들은 자기 아버지가 버스를 운전기사라는 점, 또 삼촌이 커다란 버스타이어를 밀고 다니는 기름쟁이(정비기사)라는 사실을 자랑스레 생각했고 버스정류소 바로 옆의 2층 집에 사는 차부(車部)집 아이는 부잣집 아이로 취급되었습니다. 또 언양차부의 여섯 대 중에 어느 버스가 가장 속도가 빠른 신차인지, 또 그 버스의 운전사가 누구네 삼촌인지마저 커다란 영예로 생각되어 

“나는 3816번이 제일 빠르고 멋진 것 같아.”
“아니야. 난 새로 들어온 1627번이 더 빨라.”

같은 대화를 나누다(아직도 번호가 떠오르는 이 모든 기억의 저주를 어찌하랴?)

“우리는 언제 저 버스를 타고 부산 같은 대처(大處)를 구경할까?”
“맞아.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누구네 형과 서울에서 대학교에 다니는 누구는 나중에 면장보다도 더 높은 사람이 될 것이래.”

했습니다. 당시에 커다란 마이크가 달린 지프차를 탄 면장이 읍내는 물론 부산과 울산, 대구와 밀양방향으로 뚫린 국도를 돌아다니며 
“면민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언양면장 김교안이 모내기철을 맞아 광파다비, 소주밀식에 대해서 안내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방송하는 언양바닥에서 가장 높은 면장보다도 더 높은 사람이 될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여기서 잠깐 방송내용을 설명하면 광파다비는 평야지대의 토질이 좋은 논은 벼 심는 골을 넓게 하고 비료를 많이 주는 것, 소주밀식은 숨어서 소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척박한 천수답에는 적은 수의 벼 포기를 빼곡하게 심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모두들 버스와 객지를 동경하던 시절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남천내 공굴(다리)밑에서 목욕을 하고 제방에 앉아  버스를 보며 감탄하는 동안 아버님이 몸이 아파 원조소년가장격인 저는 벼나 보리를 베고 저다 나르는 농사일에 바빴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하기 싫은 일이 국도35번의 고갯길 오룡골 논에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풀베기나 논매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잘못하면 버스타이어에 튕긴 돌멩이가 논으로 날아오기 일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먼지를 보얗게 덮어쓴 모습을 느지막이 하학하던 동급생들이 보는 일도 계면쩍고. 거기다 고등학생이 되어 좋아하는 소녀가 생기면서 혹시 그 소녀가 오룡골을 넘어가다 날 쳐다볼까봐 늘 신경이 쓰이고요.

또 당시에는 부역(夫役)이라는 이름의 아주 특별한 조세(租稅)가 있어 우리 마을 평리에선 35번국도의 출발지인 정거장에서 오룡골 덕천고개까지 집집이 한 20여m의 구간을 맡아 장맛비가 끝난 8월 초에 자동차와 비로인해 움푹 패여 물이 고인 물구덩이를 흙으로 메우고 타이어에 튕겨나가 모래만 남은 노면에 남천내에서 자갈을 주워 평평하게 깔아야 했는데 그 역시 외로운 소년 저의 몫이었습니다.

 사진2. 옛날 언양 차부(車部)가 있던 자리. 얼마전까지 저 건물에서 동창생이 약방을 경영했음.(200702)
 옛날 언양 차부(車部)가 있던 자리. 얼마 전까지 저 건물에서 동창생이 약방을 경영했음.(200702)

우리의 등굣길은 징검다리로 강을 건너는 방법과 <남천내 공굴>이라는 다리를 건너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 다리는 1890년경 일인이 우리 땅의 쌀과 목재를 수탈하기 위해 뚫은 부산-서울간의 35번국도 길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목에는 <정거장>이란 7, 8호 정도의 작은 마을이 있어 당시 언양에서 첨단산업에 속하는 여인숙과 엿공장과 고물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나이가 쉰이 넘어 세삼 아버지의 생애를 알아보다(주로 누님들과 형수들의 진술로) 당시에 병에 걸려 구들장을 지고 살던 우리 아버님도 한때 그 귀한 버스를 타고 부산과 낯선 항구를 전전하며 어떤 때는 고깃배를 타고 또 어떤 때는 남의 집 머슴을 살거나 숯을 구웠다는 사실, 그러니까 유복자로 태어난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힘들고 외로운 소년시절을 보낸 사실을 알고 눈물이 났습니다. 다들 그렇게 힘들게 살았지만 그 괴로운 과거를 결코 자식들에게 이야기를 않는 것이 그 세대의 미덕이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남의 버스만 쳐다보던 저는 스무 살이 되던 1070년 그 어려운 예비고사를 합격하고 야간대학 국문과에 입학한다는 언양시장 <노란신문>에 나면서 국어선생이나 소설가가 되어야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4시간이나 걸리는 털털이 버스를 타고 떠나 부산천지를 무려 45년을 헤매었지만 결국 그 꿈을 결코 이루지 못하고 다시 신불산 아래로 돌아와 이렇게 병든 몸을 추스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병중의 아버님이 흥얼거리던 <신작로타령>을 올립니다. 요즘도 간혹 신작로(新作路)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본래 신작로란 말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역참제가 폐지되어 마발이나 보발로 장승이 서 있는 고개를 그 한길(넓은 길)을 일인들이 자동차가 다니는 길로 바꾸면서 <새로 닦은 길>이란 말입니다.

  신작로 넓어서 길 가기 좋고요
  전깃불 밝아서 임 보기 좋네
  너나 나나 둘이 살짝 흥응응
  낮이 낮이나 밤이 밤이나 참사랑이로구나.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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