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소 새끼나 먹이려고
포토 에세이 통산 1030(2020.7.11)
이득수
승인
2020.07.10 11:29 | 최종 수정 2020.07.11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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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회에서 우리는 <저 넓은 초원위의 그림 같은 집> 목장이 이제 마을로 내려오고 한껏 멋을 풍기던 둥근 뾰족지붕 사이로우도 길바닥에 주욱 늘어선 <곤포사일리지>로 바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 때 들여왔던 외래종 목초 이탈리안 라이그라스, 오차드 그라스, 티모시, 러시안컴프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요?
먼저 잎이 넓고 부드러운 러시안 컴프리(적힐초)는 잎에 이뇨성분이 있어 녹즙으로 먹거나 제약원료로 사용되지만 전처럼 대량으로 재배되지는 않지만 간혹 들길에서 진자주 빛 고운 꽃으로 살아남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 볏과 식물인 이탈리안 라이그라스, 오차드 그라스, 티모시는 옛날식 목장이 사라져 황무지로 변해버리고 그 씨앗이 날려 들길이나 산기슭에 가득히 자리 잡고 있지만 외래식물이라 그런지 주변의 분위기에 흡수되지도 못 하고 들풀다운 살가운 맛이 없어 우리가 군에서 예사로 쓰는 말 <괜히 객지에 와서 고생이 많다>가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그럼 요즘의 소들은 무슨 사료를 먹는 것일까요? 놀랍게도 한 세대 전이 귀한 양식이자 간식거리인 옥수수가 서양에서 들어온 키가 큰 밀 귀리와 함께 그들의 주식이 되었습니다. 처음 제가 시골에 와서 들길을 걷다 여기저기 옥수수가 심긴 것을 보고 왜 저렇게 많이 심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옥수수는 우리 어릴 적 배고픈 아이들에겐 아주 맛난 간식거리였지요. 당시의 논밭에는 오로지 벼와 보리만 심어 여간 부농이 아니고는 옥수수를 심지 못해 가난한 집 아이들은 삶은 옥수수 하나 먹는 일이 너무나 호사스런 일이었지요. 그리고 학교에서 배급받던 강냉이죽과 옥수수쌀에 시골장날 최고의 간식거리 강냉이박상...
그런데 어느 날 웬 농부 하나가 콤바인을 몰고 오더니 그 귀한 옥수수를 한창 익은 열매가 달린 채로 단숨에 베고 토막을 쳐 커다란 비닐봉지에 담아 <곤포사일리지>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직까지 옥수수를 간식이나 음식으로 생각하던 제게는 충격이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조사료(거친 잎사귀)에 농후사료(옥수수 알갱이)가 적당하게 혼합된 옥수수곤포사일리지야말로 꿈의 사료인 것이지요.
지금 농촌들판은 적으면 한 20~30%, 많게는 절반도 넘게 옥수수를 재배하는 형편이라 옛날 포근한 초가지붕이 옹기종기 모인 모습은 사라지고 창고 같은 축사 옆에 만리장성처럼 사료더미가 쌓인 모습뿐입니다. 오로지 곡식 한 줌에 목을 매던 옛날 우리 어머니 명촌댁이 보면
“뭐라꼬? 소 새끼 믹일려고 강냉이를 심어?”
하고 엄청 화를 낼 일입니다.
귀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금야금 우리의 들판을 파먹어 들어가는데 그 용도가 소를 먹인다는 것이 좀 그렇지 귀리가 한창 자라는 4, 5월의 귀리밭의 풍경은 참으로 평화로워 산책길의 마초가 저만큼 달려나와 껑충거리는 모습에서 참으로 평온한 농촌의 정취가 묻어나기도 합니다.
20~30농가의 벼를 다 판 돈보다 커다란 축사에서 한 번 소를 낸 돈이 더 많은 세월이라 그렇게 농촌이 변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이 이제 당연한 풍경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되다보니 옛날 우리가 참 멋지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던 목동이란 직업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자라던 시절 목장 자체가 넉넉한 집이라는 인식 때문에 목동도 참 부러운 직업이라 아일랜드민요 <아, 목동아>의 내용이 뭔지, 그게 전사한 아들을 묻은 아비의 비통한 절규임도 모르고 우리는 매우 감미로운 목소리로 <아, 목동아>를 열창했던 것처럼 많이 부러워하고 동경했던 직업이 목동(牧童)인데 그 목동이 사라져버리다니요?
이제 보기 힘든 목동을 생각하며 번안곡 <홍하의 골짜기> 가사를 올립니다.
홍하의 골짜기
정든 이 계곡을 떠나가는
그대의 정다운 그 얼굴
다시 한 번만 예기 하고픈
목장의 푸른 잔디밭 위
언덕을 넘어서 가던 그날
수선화가 피어있었지
다시 한 번만 돌아 오렴아
아아 목동이 살던 계곡.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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