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무얼 하며 어딜 가는가의 문제는 모든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질문이지만 그게 책을 좀 읽고 집필도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이 말기암환자라면 참으로 심각한 고민, 마치 여자가 선악과를 손댄 이브의 원죄(原罪)로 온몸이 찢기는 고통으로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이상의 고통과 번민이 될 것입니다.
명촌리에 귀촌하자마자 병이 난 60대 후반의 무명시인인 저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자신에 대한 회의와 실망이 더욱 심했습니다. 아내와 자식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관계 하나하나가 마치 소의 멍에나 조선시대 죄수가 목에 쓴 칼, 질곡(桎梏)처럼 나를 조여왔지만 도무지 벗어날 수도 없고 빠져나오기나 잊기는 더욱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하루는 말입니다. 무심히 오래 전에 돌아가신 큰 누님과 노인요양병원에서 아무 생각도 기억도 없이 그냥 숨만 붙어있는 둘째누님을 생각하다 그냥 벌쭉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렇지요. 그 두 사람은 언제 어디서 저를 만나도 반가워했고 무엇이든지(특히 먹을 것) 주고 싶어 했습니다. 제가 혹시 마음을 상할까 늘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고 제가 기분 좋게 웃는 것과 맛있게 음식을 먹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양말이나 사과 한 줄, 국밥 한 그릇을 사 주어도 <부산에 내 동생 득수>가 사준 것이라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끝없이 자랑해 까칠한 도시여자 제 아내가 늘 조마조마 애를 태웠습니다.
농사일이 바쁜 어머니 대신 저를 업어 키운 두 누님, 그 중에서 둘째 누님은 아버지가 인간 안 된다고 거름밭에 버리라는 아이를 열여섯 철없는 나이에 마치 자기 자식인양 가슴에 품어 키웠고 큰 누님은 그런 동생을 두고 시집을 갔다 다시 돌아오고 또 다시 재혼을 하는 과정에서 정이 들 만하면 헤어져야 하는 다섯 살짜리 막내(제가 여덟 살 때 제 아우가 태어났음) 섭섭할까 너무너무 애틋했던 것 같았습니다.
큰누님이 예순이 넘고 제가 마흔이 되어 둘이 같이 부전역에서 기차를 타고 영주의 큰집에 제사를 지내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시골할머니이자 언양장터의 난전꾼인 누님이 자리에 앉자마자 사과를 하나 꺼내 깎더니 캔 맥주를 세 개나 내어놓았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날 때는 캔 커피가 제격이라고 두었다면서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누님이 떡과 사이다와 야쿠르트까지 하도 여러 가지를 내어놓는 바람에 한글을 몰라 책도 못 읽고 말솜씨도 없는 누님이 평생 처음 동생하고 어디 가는 것이 너무 좋아 잠이 안 오더라는 말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찔렀습니다. 저를 좋아하는 누님에게 나는 평소에 뭐하나 해준 것이 없는 것 같고...
둘째 누님은 아예 운명적으로 <동생바라기>로 태어난 사람처럼 저를 위해 참으로 많은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밤마다 빨갱이가 판을 치는 전쟁통에 진장 과수원에 복숭아를 떼다 상북면 일대는 물론 재 너머 배내마을까지 가서 돈 대신 보리쌀로 바꿔 이고 오는 우리 어머니와 약속을 하고 친정 명촌마을에서 하루 만에 만나 젖을 먹이는 역할을 열여섯 어린나이로 해낸 사람이 바로 둘째누님인 것입니다.
나중에 저를 농사꾼을 만들려고 국민학교 입학식날 아버지가 보내주지 않아 우물가에서 두레박줄을 잡고 울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아버지와 싸우기까지 하며 저를 업고 뛰다시피 학교에 가서 입학을 시켜주었고 어떻게 알았는지 입영하는 새벽에도 집결지 진영국민학교에 찐쌀과 단감을 들고 와서 긴긴 기도를 해주고 오랫동안 철길 옆에서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제가 그 누님에게 무얼 해준 것은 좀 넓은 농토를 가지려 김해 한림면 명동리 금음부락이라는 깡촌에 버려진 황무지를 사 밭을 갈고 단감나무를 심고 살았지만 멀리 언양서 이사를 온 데다 교회를 다녀 마을사람들과 친하지 못해 그냥 좀 시끄럽기만 한 <언양방송국> 우리 누님의 남편인 둘째 자영 김재근 씨가 환갑이 닥쳤지만 마을사람이 아무도 축하를 해주지 않았을 때입니다.
며느리와 사위도 보고 손자도 있었지만 다들 숫기가 없어 그냥 우물쭈물 할 때 마흔두 살로 부산 서구청 감사계장으로 있던 제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우선 마당에 멍석을 깔고 술상을 차리고 절구공이를 둘러 맨 자영을 뒤에 앉히고 들에 가득히 핀 들국화와 쑥부쟁이를 한 아름 꺾어와 장독뚜껑에 꽃꽂이를 하고 가까운 이장집의 마이크를 빌려 와(이건 순 동사무소직원의 경험에 의한 것임)
“아, 아, 마이크 테스팅. 금음마을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여러분이 잘 알고계시는 언양방송국 이갑조 권사의 남동생 이득수입니다. 오늘 우리 자영의 환갑날인데 객지 사람이라고 마을 손님이 통 없어 많이 섭섭합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잔칫상을 준비한 당가(當家)집 마당으로 오시면 닭을 잡고 술을 길러 정성껏 대접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즐기기로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언양방송국 동생의 노래 한 곡을 감상하시겠습니다.”
하고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로 시작되는 유행가를 한 곡 뽑자 슬금슬금 한 두 명씩 동네 할머니들이 찾아오더니 이내 마당 가득히 주민이 모여 먹고 마시며 노래하며 오후 내내 즐기다 마지막엔 풍물을 가져다 치기도 하고 춤판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안 그래도 부산동생 득수라면 그냥 깜뿍 넘어가던 우리 누님이 그 때부터 저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 믿고 사랑하는 정도가 심해 요양병원에서 기억력이 자꾸 희미해지자 마침내 남편과 자식들이름을 거의 다 잊고도 부산동생 득수를 끝까지 기억하다 눈을 감은 것입니다. 언제 읽어도 눈물이 돋는 삼천로 바닷가 순정파 시인 박재삼의 시조 <노안>의 1년을 올립니다.(다음 회에 계속)
노안(갈대밭 위로 나는 기러기) / 박재삼
하 많은 기러기 중에
서릿발 깃에 절은
어미도 아비도 없는
그 우에 누이도 없는
그러한
기러기가 길을 내는 하늘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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