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망초 꽃, 먼먼 그리움, 긴긴 그리움

포토 에세이 통산 제1032호(2020.7.13)

이득수 승인 2020.07.12 11:48 | 최종 수정 2020.07.18 16:23 의견 0
사진1 망초 꽃(좌)와 개망초 꽃(우)이 나란히 핀 모습
망초꽃(외쪽)과 개망초 꽃이 함께 핀 모습.

한여름의 들길을 걷다 보면 가장 쉽고 흔하게 눈에 띄는 것이 저 하얀 개망초 꽃일 겁니다. 희게 반짝이는 동그란 꽃송이, 그 한가운데 노란 꽃술들, 그래서 항간에는 개망초 꽃을 <계란프라이 꽃>으로 부르기도 한답니다. 

자세히 보면 동그란 꽃잎과 선연하게 흰 빛과 황금빛의 조화로 아름다움의 조건을 꽤나 갖춘 것 같은데 어찌된 셈인지 이 나이가 되도록 망초꽃이 아름답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선은 망초꽃이 너무 흔하고 수세가 왕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꽃송이도 아름답고 향기가 많아 벌, 나비가 많이 찾은 데도 너무 쉽게 대할 수 있어 그런지 누구라도 귀한 꽃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 아름다운 이름을 개망초라고 붙였는지.

그럼 망초꽃은 어떤 꽃일까요? 역시 한여름의 들길을 걸으면 안개꽃처럼 작고 하얀 꽃이 수십 개씩 꽃 타래를 짓고 그런 타래가 수십 개쯤 되는 망초꽃이 끝없이 펼쳐져 논길을 넘어 산기슭에 이르러 마침내 산 능선위로 나풀거리는 하얀 꽃무리를 발견할 수가 있는데 이게 바로 망초꽃입니다.

옛사람들이 동식물을 작명할 때 가장 흔하고 대표적인 종과 뭔가 조금 격이 떨어지거나 다를 때 그 앞에 <개>자나 <돌>자를 붙이는데 개다래, 개복숭이 그 사례가 되고 간혹 어미에 미나리아재비는 농병아리사촌이니 하는 연관관계를 표시하는데 이 망초와 개망초는 뭔가 바뀐 것 같기도 합니다. 개망초가 훨씬 더 꽃이 크고 또렷한데 말입니다. 

한편 봄이 되어 들에서 나물을 뜯을 때 초록색만 띠면 아무런 독이 없다고 씬냉이, 나시랭이, 까막발, 달래 등을 닥치는 대로 뜯는데 논두렁에 유독 새파랗고 키가 큰 <부지깽이나물>무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나물 양이 많이 부족할 때가 아니면 좀체 뜯지 않았는데 그건 식감이 좀 거칠기 때문이었습니다(경상도가 아닌 다른 지방에선 그 망초 순을 아주 별미로 부쳐먹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본 일이 있음.).

평생을 농촌에서 산 제 두 누님도 그 <부지깽이나물>이 자라 망초꽃이 된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게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사실 순수한 사람들은 일상속의 하나를 둘로 연장해서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는 모양, 누님들의 생활양식이 너무 단순하기 때문이겠지요.  

밤에 들길을 걷다보면 어둑한 들길을 따라 소금을 뿌리듯 하얀 망초꽃의 물결을 볼 수가 있습니다. 희어도 그냥 흰 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티끌과 잡념을 다 씻어낸 시리게도 하얀 망초꽃의 물결을 바라보다 어떤 때는 씻다, 씻다 모자라 저렇게 표백(漂白)까지 한 새파랗게 얼어붙은 하얀 빛의 망초꽃은 어쩌면 반만년 이 땅을 살다간 서러운 민중들의 한숨이 모이고 그 이루지 못한 열망과 서럽디서러운 기억이 뭉친 한의 꽃이라는 생각, 일찍 남편을 잃은 청상과부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작은 별 하나를 바라보며 서러움에 젖은 모습 서러움, 수없이 도전해도 번번이 낙방하는 이 시대의 고독한 젊은이, 구직자의 행렬 같다는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이 일흔이 된 이 늙은이가 방긋 웃는 개망초 꽃을 보면서 아주 오래 전부터 늘 그리워했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밤에는 끝없이 펼쳐져 무섬기가 들도록 하얀 망초꽃의 물결을 보고 그 작은 하나하나가 내 맘속의 작은 그리움의 포말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들고.

사진2 그리움이 뚝뚝 묻어나는 쓰러진 개망초꽃(6.19)
그리움이 뚝뚝 묻어나는 쓰러진 개망초 꽃

그렇게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면서 문득 망초꽃의 <망>자가 한자로 무슨 <망>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망해버린 망(亡)초꽃, 어지러운 망(芒)초꽃, 끝없이 펼쳐진 망(茫)초꽃에 잊어버린 망(妄)초꽃, 잃어버린 망(忘)초꽃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르다 마침내 하얀 그리움으로 부푼 꽃, 부풀 망의 망초(望草)를 떠올리고 사전에 확인하니 역시 그랬습니다.

(그래, 그렇지 그리움의 망초꽃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하얗게 들판을 적시고 내 가슴을 적실 수가 없지)
하며 오래 전 한 20년도 더 전에 쓴 시 한편을 찾아내었습니다.


         망초꽃 / 이득수
 
망초꽃은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이다.
거침없이 진군하여 완강한 나치스를 뚫고
라인강, 볼가강을 지나 툰트라의 눈밭을 넘어
그 음울한 시베리아의 침엽수를 덮쳐가는...

원시의 언덕처럼 초록색 끝없는 내 가슴언덕에
너는 왜 망초처럼 하얗게 밀려왔을까,
순백의 그리움으로 채우어진 내 가슴에
너는 왜 머물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고

일 년에 한번 불쑥 솟아났다 사라지는
지심(地心)의 영혼, 풀이 되어 왔을까,
겨울바람 가득한 그리움의 고향은
저 어두운 지층 속 어느 층계쯤일까
 
망초꽃 피고지고 망초 꽃 피고 지고
아아, 어느 새 내 머리에 망초꽃이 피었는데 
아아, 이제 알겠다. 저 외래의 꽃 하얗게 덮어올 때 사람들이 왜 망초꽃으로 불렀는지,
잊어야지, 잊어야지, 망각의 꽃 망초로...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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