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치과의사 엄영호의 허전한 퇴장

에세이 제1086호(2020.9.6)

이득수 승인 2020.09.05 19:04 | 최종 수정 2020.09.05 19:36 의견 0
 사진1. 1960대 우리가 자란 버든 마을
 1960대 우리가 자란 버든 마을

내가 마흔 다섯이 되던 해 <동장시인>이란 좀 이상한 타이틀의 내가 부산일보사강당에서 출판기념회를 하는데 뜻밖에도 고향친구 엄영호와 중등교사 신용찬, 주류화사 상무 김진태 삼성에 다니는 신석찬 등 네명의 마을친구가 찾아왔다. 그들은 한창 닭서리를 하고 이웃마을을 습격하던 시절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울산문화방송에 음악신청 연애편지나 보내던 내가 시인으로 출세를 했다고 껄껄 웃었다. 그리고 그해 연말 재부 향우회를 하자더니 나와 다섯이 모였는데 행사를 두량하고 음식점과 술집의 비싼 결제를 하는데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월급쟁이인 우리보다 개업의인 자기가 돈을 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에도 일년에 두 세 번 만났지만 연말에는 연산로터리의 초밥집에서 아주 호사스럽게 저녁을 먹고 연산동 사는 내가 두량해 노래방에 가서 한 두어 시간을 무아지경으로 노는데 도우미들이 보는 데서는 치과의사는 <원장님>, 술도매상은 <전무님>, 중학교선생님은 <교장님>, 회사원은 <이사님>, 구정국장이든 나는 <부구청장님>이 되어 질펀하게 돌기도 했는데 그 대부분을 그가 부담했다.

그는 자신이 소이까리 장사를 하는 시골부자의 장남으로 아무 걱정 없이 서울의 대학교를 나와 군의관이 되고 의사가 되고 좋은 아내를 얻어 아들 둘과 며느리까지 몽땅 치과의사가 되어 돈 하나는 걱정이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옛날 촌놈 기질이 남아서 꼭 필요 없는 돈은 절대로 안 쓰는데 고향친구한테는 이보다 더 써도 안 아깝다고 했다. 개구쟁이 내 친구가 그냥 남 좋게 하고 자기 손해 좀 보면서 천심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농사꾼의 아들이 되어 부산이란 대도시에 우뚝 선 것이었다

그후 그렇게 모인 부산의 친구 다섯과 언양에 남은 고추친구 7명 정도가 한 해 한번쯤 홈커밍데이(Home coming day)라고 해서 하루는 언양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다리 밑에서 요리해서 먹고 다음은 부산 자갈치에서 비싼 회를 실컷 먹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간암에 걸려 의기소침할 때 그가 안부전화를 해서 내건강이 어떠냐교 걱정이 가득했다. 내가 아직 견딜 만하다고 해도 급성간암이 터져 개복수술까지 했으니 잘 해야 한 두 달 버틸 것으로 보고 차마 전화도 못 했는데 아직도 살아있으니 고맙다고 했다. 나는 아직 내 컨디션이 밥 먹고 운동하고 글쓰기에 지장이 없다고 해서 지난해처럼 모이자고 연산로터리의 초밥집과 노래방에서 망년회를 하자고 해서 모였는데 초밥집의 식사가 끝나니 아무도 노래방에 가자는 소리를 않았다. 나처럼 심한 애주가도 별로 없었지만 병든 친구를 보니 그럴 마음이 없어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  개구쟁이들이 벌써 예순 일곱. 여덟 상노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2018년 뒷산에서 두릅을 따던 내가 문득 언덕에서 주르르 미끄러졌는데 입안이 얼얼해 만져보이 윗니 하나가 빠져버린 것이었다. 오래 전부터 충치에 풍치까지 앓아 친구가 몇 번이나 보수공사를 해 준 것이 마침내 종말이 온 것이었다.

당시 이웃의 한 할머니로부터 내 또래의 사내동생이 폐암이 와서 공기 좋은 고향에 가서 거의 다 나았는데 자식들이 임플란트시술을 해준다고 이빨을 건드려 폐암이 전이 되어 죽었다고 나더러 절대로 이빨에 손을 대자 말라는 이야기를 한 지가 얼마 안 되어 눈앞이 캄캄했다.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니 대문이 무너진 집구석처럼 꼴이 말이 아니라 아내가 이제 영감하고 더는 못 살겠다고 깔깔 웃었다. 하는 수 없이 수영으로 전화를 하니

“야, 명도 길다. 아직도 안 죽었나? 간암도 이기는 사람이 그 까짓 이빨하나에 그리 기가 죽다니?”

당장 내려오라고 해서 병원에 가니 우리 또래 시내하나늘 불러 

“영옥이신랑이라 촌수는 우리보다 낫지만 나이는 형뻘이다.”

집안의 장남답게 사촌매부들을 기공사로 또 치과재료상으로  다들 먹고살게 챙기는 모양이었다. 이어 입안을 재어 이빨 본을 떠드니 금방 가치라고 임시이빨을 끼워주며 닷새 뒤에 오라고 했다. 집에 오니 전에 보다 더 멀쩡하다고 아내가 웃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가벼운 유방암을 수술한 자기 아내가 10년이 넘어도 많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다 친구를 보니 친구의 낙천적인 성격과 인간성의 승리라고 나를 치켜 올렸고 나는 그게 다 매일 신불산 쳐다보고 산 언양사람의 마음바탕이나 품성 같은 것이라며 웃었다. 

그리고 그날은 우리가 자라던 시절의 이야기, 병든 아버지를 안은 내 그림자가 비치는 장지문 너머 그와 친구들이 우리 집의 닭을 서리하고 여름별미인 장독간 위에 먹다 남은 감자수제비와 한 겨울의 동치미에 대해서 이야기 했고 나는 늙은 부모 밑에서 크는 나와 내 동생에게 겨울이 오면 불러다 더운 물에 불려 손을 씻어서 료션을 발라주고 참가가미를 구워 쌀밥과 함께 먹이던 그의 어머니를 회상했는데 아버지는 7순이 넘게 살았지만 어머니는 젊어 죽어 새 엄마 밑에 생긴 동생까지 얼마 전에 장가를 보냈다고 했다. 참 소박하고 성실하지만 너름새도 좋은 사람이었다.

부산의 친구들 초대해 버든의 친구가 벌여주는 홈커밍데이 이미지(사진은 장촌리 네째 누님과 마을사람들이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를 읽고 작가얼굴을 한번 보려고 초청한 자리.
고향 버든 친구와 부산에 사는 친구들이 함께 한 천렵 회식(장촌리 넷째 누님과 마을 사람들이 필자의 포토 에세이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를 읽고 작가얼굴을 한 번 보고 싶다며 마련한 자리).

지난 봄 식사 중에 입속이 허전해 살펴보니 하나까리 틀니가 빠졌다, 거울을 보니 그 옆의 앞니가 빠지며 걸고리가 없어 빠진 것이었다. 미리 전화를 하고 그날 오후 부산에 내려가니

“하하하. 재수도 좋은 친구야. 내 벌써 병원 문을 닫고 삼동의 별장으로 농사를 지으러 가려했는데 마침 코로나19 때문에 수십 년 같이 일한 간호사가 재취업이 안 되어 한두 달 더 기다리며 동네 할머니들 사랑방이나 제공하는데 이제 이 병원의 마지막 손님으로 자네가 왔네. 정말 멋진 마감을 하네!”

 기뻐하며 또 다시 늙은 재매를 불러 입속을 재는데 

“형님!”

아홉 살 적은 그의 막내 동생 상영이가 나타나 나에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온나. 안 그래도 문 닫기 전에 니가 한 번 와서 내가 마무리를 해주고 가려고 했는데.”

하면서 익숙한 솜씨로 동생과 고향친구를 치료했다. 치료가 끝나고 일생을 잘 도와준 친구와 의사로의 마지막 사진을 한장 찍자고 하니 대머리가 훤한 영감님이 어찌 그리 또 수줍음을 그리 타는지.

이득수

그날도 치료비를 안 받으면 평생 빚을 진다고 하자 그가 웃으며 대신 밥을 사라며 주류회사를 나와 가까운 곳에 진태라는 친구를 불러 셋이 저녁을 먹었는데 그날은 또 진태씨가 밥값을 내고 말았다.
 
참 착하고 의젓한 치과의사였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마침내 끝장이 온 것이다. 그러나 병사(兵士)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라는 멕아더의 말처럼 그 착한 치과의사는 이제 나처럼 차분한 시골영감으로 돌아가 다시 매일 나처럼 신불산을 볼 것이었다. 

친구야,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자. 가끔 만나자!

<시인·소설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