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치과의사 엄영호 원장의 뒷모습

포토 에세이 제1084호(2020.9.4)

이득수 승인 2020.09.03 16:25 | 최종 수정 2020.09.03 16:40 의견 0
그와 내가 자라난 1950년대의 바든(생가)마을, 들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성묘를 가는 사람들
그와 내가 자라난 1950년대의 버든(생가)마을 전경. 아래 들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성묘를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부산 수영로타리 해운대 가는 방향에 엄영호라는 치과병원이 40몇 년 골목대감처럼 자리잡고 있어 남녀노소 수많은 환자가 치료를 받았지만 그 중에 제일 숫자를 많이 차지하는 것은 이미 이빨이 홀쭉하게 다 빠져 달리 이빨치료를 할 일도 없는 노파들이 매일 여남은 명씩 진을 쳐도 단 한 번도 싫어하지 않고 음료수와 간식을 제공하는 참 착한 의사였다.

그런데 진료실에 들어가면 그는 좀 독특하고 냉정한 의사, 돈벌이가 되는 이빨꾸미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마을사람이든 고향친구든 누가 와도 

“다 늙어서 임플란트 한다고 돈 버리고 몸 고생할 필요가 없어요. 그게 영구한 것도 아니고 한 10면 지나면 또 해야 되고...” 해서 모든 결론은 돈이 적게 들고 튼튼한 브릿지(아랫이빨 빠진 자리를 다릿발처럼 길게 세워는 송곳니에 고정시키는 것과 윗니 빠진 자리에 모형이빨을 만들어 끼우는 의치 밖에는 시술하지 않았다. 그의 지론은 선천적으로 잇몸이 튼튼해야 이빨이 튼튼한데 특히 송곳니의 뿌리가 약한 사람은 아무리 비싼 돈을 들여 임플란트를 해도 금방 물러빠지니 다시 틀니나 브릿지를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6,25동란 때 수많은 피난민아 언양장터로 몰려들고 저녁마다 신불산에 빨치산이 봉화를 올려 모두둘 불안에 떨던 시절 겨우 40호 남짓한 우리 버든 마을과 구시골에서 모든 부모님들이 본능적인 위험을 직감 20명 정도의 가임여성이 무려 19명 90%가 넘게 한꺼번에 토해낸 나의 마을친구이지만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많았다. 어릴 적 그는 덩치가 크고 행동이 잽싸고 운동을 잘 했는데 그중에서 야구 비슷한 다이꽁이란 게임을 잘 해서 늘 삼진을 당하는 나 같은 친구를 홈런으로 재생시킨 주장이었다. 스케이트를 만들어 타거나 연날리기도 선수였는데 좀 개구쟁이 기질이 있어 친구들을 놀리기에도 능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부산에 살지만 방학 때마다 버든의 큰집에 와서 마칠 때까지 머무는 신용찬이란 친구와 의기투합 마을아이들을 규합해서 8.15 면단위 마을대항 축구대회나 닭서리, 복숭아와 수박서리에 열중했는데 50년생에서 51년생 동란동이 사내만 열 셋이나 되는 판이라 천부적으로 닭을 잘 잡는 경준이, 넓은 기와집 사랑채를 혼자 사용하는 부잣집아들 종석이 등 멤버가 참 좋았는데 놀다 놀다 나중에슨 이웃마을을 야습해 수박이나 참외를 따오거나 처녀들이 보이면 희롱하고 도망하는 놀이를 즐겼는데 산 너머 수남이니 도호니 쌍수정이 하는 마을의 아이들로 똑 같이 우리마을을 습격해 학교에 가면 서로 잘 아는 동급생이지만 어둠을 무기로 예사로 돌을 던지는 투석전을 벌리기도 했지만 누가 심하게 다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시골소년들이 심심할 때 노는 방법이었다. 

마지막진료를 마친 오후의 기념사진
마지막 진료를 마친 오후의 기념사진

그 때 그는 동네의 골목대장이었고 나는 유일한 불참자 열외였다. 낮에는 농사일과 나무, 밤에는 아버지 배를 주물러야하기 때문에 나갈 시간도 없지만 그들이 억지로 데리러 오지않은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달리기가 늦어 수박밭 주인이나 이웃마을 아이들에게 잡힐까 두려워서였다.

그런 그가 서울 경희대 치대를 나와 치과의사가 되어 수영에 터를 잡은 지 그 50년이 되자 그는 자신이 꽤 유명한 의사가 됨과 동시에 아들 둘이 다 치과대학을 나오고 며느리들도 치과의사라 한집안에 치과의사 5명이 있는 집이 되었다. 그런데 마을친구인 내가 가서 보면 뭘 제대로 걱정하고 치료해주기는커녕

“야, 나이 들면 다 그렇게 이빨이 상하고 잇몸이 흔들리는 법이다. 나도 그런데 너는 안 그러랴?”

끌끌 웃으며 그저 상한 이빨을 깎아내고 덮어씌울 정도지 다를 치과처럼 비싼 임플란트를 강권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리고 나이 쉰이 넘자

“치과 의사는 50이 넘으면 의사가 아니야 눈이 어둡고 손이 떨리면서 어떻게 수술을 한단 말인가? 그냥 골목에 사는 이빨 빠진 노인네들 말동무나 해주는 거지.”

하며 내가 가면 이빨을 꼼꼼히 때우거나 너무 검은 부분을 벗겨

“이만 하면 동장님으로 손색이 없어. 치과친구 있다고 이빨 걱정은 없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마. 우리 부모님도 뭐 특별한 조치를 못 해드리고 또 필요 없는 진료는 누구에게라도 안 하는 것이 치과의사의 도리야.”

하고 말았다. 한번은 나의 연산로터리산악회에 오래 몸을 담은 등산친구 김몽룡 씨가 아래 위 이빨들이 결단이 나서 통 먹을 수가 없다고 해서 수영의 엄영호치과늘 권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 주에 만났는데

“보소. 당신 친구는 의사도 아니야. 내가 돈 걱정 말고 임플란트를 해주라고 하니 돈 아니라 금을 준대도 못 한다는 거야. 잇몸은 물론 송곳니가 약해 무어든 부지하지 못한다는 거야. 그래서 굳이 하려면 틀니를 하라.”

는 말에 신경질이 나 이웃 젋은 의사에게 가서 상의하니 임플란트를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해서 이미 발치도 하고 기초공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아니다. 내 친구가 아니라면 아니다.”

하고 한 달 쯤 지나자 새로 한 임플란트가 몽땅 내려앉았다고 이제 마지막으로 엄영호치과로 가야 되는데 미안하다고 미리 양해를 좀 얻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주에 만나니 위에는 틀니로 아래에는 브릿지로 완전무장한 김몽롱씨가 

“야, 우리 이 국장뿐 아니라 언양사람은 참 진국이야. 그사람이 나보다 한 살 적지만 나는 오늘부터 그를 죽을 때까지 존경하기로 했네.”
 하고 웃었다.(내일 계속함)

<시인·소설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