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부용화(芙蓉花)와 닥풀꽃, 정미조와 이미배

포토 에세이 제1085호(2020.9.5)

이득수 승인 2020.09.04 22:36 | 최종 수정 2020.09.04 23:14 의견 0
1970년대 디바이자 미술가 정미조 씨. [YTN 인터뷰 장면 캡쳐]

지난 5월 말이었습니다. 등말리 10여 가구의 오수정화시설을 신설하느라 집 앞에 굴삭기와 콘크리트 파쇄기가 나타난 것을 본 제게 문득 반짝 아이디어하나가 떠올랐습니다. 평소 늘 화초를 심을 화단이 좁다고 아쉬워하는 아내를 위해 병든 남편으로서 좀 특별한 선물(어쩌면 생애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화단을 확장해주자는 생각 말입니다.  

그건 건축 당시에 너무 넓게 포장한 시멘콘크리트 마당의 한 귀퉁이를 가로 2 - 3, 세로 7m, 면적 5평 정도를 헐고 흙을 채우고 축대를 쌓아 꽃밭을 넓히는 일이었습니다. 공사반장과 인부들에게 음료수를 대접하고 유류대는 물론 제 에세이집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까지 한 권씩 나눠주어 신이 난 사람들이 마침내 하루 만에 아주 깔끔한 화단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장마가 길어져 한 동안 가맣게 잊었는데 어느 날 문득 마치 누가 노란손수건을 걸어놓기라도 한 듯 손바닥보다 훨씬 넓게 폭이 20센티도 더 되는 넓고 화려한 꽃, 무엇보다 황금색이라 절로 눈이 가는 꽃이 단번에 <파우스티나의 뜰>을 점령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에게 저게 무슨 꽃이고 어떻게 들어왔는지 물어보니 당시에 새 꽃밭은 생겼지만 이미 봄이 이울어 꽃씨를 심거나 묘목을 사다 심기도 그래서 이웃의 부녀회를 비롯한 꽃 가꾸는 집(심지어 작은 암자까지)을 방문해 꽃과 씨를 닥치는 대로 얻어 심어서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꽃인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꽃이 큰 만큼 당연히 줄기도 엄청 키가 커 2m가 넘는 데다 꼭대기에 붙은 봉오리가 어쩐지 아욱(葵)이나 그 사촌인 접시꽃(蜀葵花) 같기도 하고 시골의 닥나무나 모시나무 이파리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음인터넷> <꽃 이름 찾기>에 들어가 사진을 찍으니 <닥풀(楮)꽃>이라고 나와 과연 촌놈다운 발상으로 한 절반쯤 맞힌 셈이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찬찬히 이 거대하고 신기한 꽃을 살펴보다 문득 작년에 그 존재를 처음 발견하고 너무 대견해했던 부용화(芙蓉花) 생각이 나서 고추밭 뒤 허수아비 옆을 찾아가니 역시 아기 손바닥보다 넓은 분홍빛 부용화 두 송이가 피어 밤이면 닥풀꽃과 서로 마주보며 주변의 조그만 꽃들에게 합창이라도 지도할 것만 같은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 순간 한 번 무슨 모티브나 테마를 잡으면 고금과 동서남북을 정신없이 떨쳐나가는 이 백두옹은 이내 부용화처럼 붉고 진하며 가늘고 작은 주름이 잡혀 참으로 안타깝고 애달픈 정서를 노래하기는 하지만 덩치가 엄청 커 그 여릿여릿함까지 서러운 중견가수 <정미조>가 생각났습니다. 

보면 볼수록 그리움이 선연한 진분홍 부용화

제가 알기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다양한 교육과 수준 높은 예술혼을 가진 그녀는 자신의 노래가 한창 인기를 얻던 시절 문득 파리유학을 떠나 회화를 전공한 수재에 멋쟁이 아티스인 것입니다. 

그녀는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의 여가수 김상희와 함께 체격과 학벌이 다 좋은 여인만이 뿜어낼 수 있는 조용하고 의젓한 여성미를 뽐내는 참 특이한 가수입니다. 그녀가 부른 노래 중 김소월 작시의 <개여울>에서 뿜어 나오는 애련한 사모의 정, 차마 포기하지도 못 하지만 함부로 몸을 내던질 처지도 아닌, 그러면서고 그 절절함이 어느 여가수에 뒤지지 않고 그 붉은 입술이 어느 가수(예를 들어 체격이 작고 당돌한 정도로 또록또록하며 도발적일 정도로 섹시한 <남행열차>의 김수희)의 이미지와 정반대이면서도 사내의 눈빛을 끌어들이기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그 흡인력의 가수, 특히 자신의 노래 <휘파람을 부세요>의 그 애절한 목소리와 눈빛, 거기다 오래 전 남자가수의 노래인 최무룡의 <꿈은 사라지고>까지 그 애절함을 완전히 소화해내는 거대한 섹시함(표현이 좀 이상한 가요)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참 <정미조>를 떠올리던 저는 <닥풀꽃>을 보며 이번에는 <이미배>란 여가수가 떠올랐습니다. 제 또래의 칠순의 이미배는 소싯적 재즈페스티벌에서 칸소네 음악으로 데뷔했다고는 하나 저 같은 가요팬도 그 이름을 모를 정도로 조용히 살아온 모양으로 요 근래에 <가요무대>에 한 번씩 등장하는데 희한하게도 제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 키 크고 머릿결과 몸매가 여릿여릿하고 작은 들창문처럼 크고 깊은 눈동자에 애수가 가득하고 조금씩 옅어지는 붉은 입술에 연륜에 알맞은 섹시함이 자리 잡은 모습과 꼭 닮이 특별한 대표곡 하나 없는 여가수가 단숨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되고만 것입니다. 

황금의 궁전처럼 눈부신 닥풀꽃

누가 봐도 그렇게 크고 당당하고 울림 깊은 목소리를 찾으라면 우리는 패티김을 그 선두로 쳐야 하나 그는 이미 <신이 낸 목소리>에 이를 정도의 대형가수라 수많은 평론가들의 찬탄의 적(的)이 되었느니 알단 제외키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내들이 예사로 말하는 묘할 묘(妙) 여자는 되도록 조그맣게 앙증맞고 나이까지 어려야 예쁘다는 말에 감히 반기를 들기로 했습니다. 이는 감히 부용화 같은 정미조, 닥풀꽃 같은 이미배를 보며 굳힌 생각입니다. 지면이 적어 이미배의 미모에 대해서 더 구차한 설명은 생략하지만 정미조가 아직도 입술에 약간의 붉은 색이 남은 애련의 미모라면 이미배는 그보다 나이가 조금 더 들어 은실로 다리를 놓은 반백의 머리를 정갈하게 쪽 찌고 말갛게 세월을 먹은 은비녀를 꽃은 옛날의 마님 같은 모습,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의 가만가만한 율동에서 기나긴 민족사와 여인사가 떠오르는, 그 잘 익어 향기로운 완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초로의 마돈아인 것입니다. 

샹송 디바 이미배 씨 [KBS 가요무대 캡쳐]

여러분, 백분이 불여일견이라고 아무리 코로나가 심해도 마스크 단단히 쓰고 이 희귀한 닥풀꽃과 부용화를 보러 명촌벌서를 방문해 주신다면 이 산골노인에게 귀한 영광이 되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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