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혼(魂)이 백(魄)에게2

에세이 제1088호(2020.9.8)

이득수 승인 2020.09.07 16:52 | 최종 수정 2020.09.07 17:14 의견 0

 

 사진1. 마흔 네 살 아기 동장(洞長) 필자
 마흔 네 살 '아기 동장(洞長)' 필자

이 엉뚱한 시험결과는 부산시 전역에 묘한 파문을 몰고 옵니다. 저는 원래 연산동에서 동사무소만 18년을 전전하며 단 한 번도 구청에 근무하지 않아 6급 승진을 꿈도 꾸지 못했는데 마침 새로 부임한 전라도출신 구청장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권력에 빌붙지 않고 묵묵히 일한 동직원을 한 명 뽑아 시범케이스로 승진시키기로 했는데 구청근무 경력도 전무한 데다 조그만 전셋집에 사는 제가 졸지에 승진을 하게 되어 제1차 부산시 인사폭탄이 되었습니다. 
 
그후 인사실무팀에 괘씸죄가 걸려 저는 곧 낯선 서구로 오게 되었는데 구청장, 부구청장이 다 유림 출신이던 시절 우연히 국한문과 고사성어가 혼용된 제안서를 내어 졸지에 감사계장으로 발탁되었습니다(서정쇄신을 겁나게 추진하던 시절 유일하게 집이 없는 주사라는 게 이유가 되어). 그래서 두 번째 인사폭탄이 되었는데 사무관승진시험제도가 바뀔 당시 서열 1번, 고과점수 자동 1번의 기획계장이라 입원기간을 빼고 실 근무 5년이 채 안 된 제가 응시를 하고 당당 합격을 하였으니까 저와 같이 연산동에서 동 직원을 하던 동료들은 이득수란 이름 석 자의 이미지는 영웅이기보다는 악마처럼 변해간다고 하였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승진한 저는 청과시장과 공동어시장이 있어 강아지도 만 원짜리 배추이파리를 물고 다닌다는 남부민1동사무소,  '고기(생선) 도가 동장'이 되었습니다. 옛 동료 하나가 제가 젊은 시절 자주 계단을 올라가던 처가 동네동장이 되었다고 깔깔 웃었지만 저는 그냥 의욕이 넘치는 젊은 동장이었습니다. 

이제 마흔 넷의 젊은 동장을 보고 70이 넘고 80이 넘은 지역유지 개발위원이다 단체장들은 저를 아예 아기취급을 했고 외근 중인 제가 돌아오면 제 소파에 깊숙이 파묻혀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대대로 새벽시장바닥이나 남부민동 달동네에 사채를 놓거나 조그만 장사를 하던 친구들이 패를 짜고 향토예비군중대장과 동장을 독점하고 그들 골목친구들이 마음대로 토색(討索)질을 하던 마을이라 젊은 행정사무관이 동장으로 온 건 말도 안 되며 곧 나를 쫓아내고 그들 중의 누군가를 동장으로 세운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칼을 빼들기로 단체원명부에 개발위원도 하고 통장도 하고 방위협의회나 바르게살기위원도 하면서 보통 서너 개의 직책을 가진 <독수리 7형제>를 손보기로 했습니다. 이어 전 단체원을 모아 회의를 하며 한 달 뒤인 95. 1. 1일 자로 누구나 단 한 자리의 단체원자리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사표를 내어달라, 지금 마을엔 젊은 청년일꾼들이 수없이 많지만 일부인사가 여러 개씩 보직을 차지해 동네 발전이 어렵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날 저녁 보수동의 술자리에서 그들과 언쟁이 심해지고 맥주병이 날아다니자 사무장이 제 앞을 가로 막아 서더니 직원들을 시켜 피신을 시켰습니다. 이튿날 구청장실에 밀려온 그들은 말도 안 된다고 항의를 했지만 구청장은 젊은 사무관의 패기를 칭찬했을 뿐이었고 그들이 절 몰아내려고 시청과 감사원과 청와대에 낸 모든 진정서는 젊은 사무관동장의 새 시책에 잘 협조하라는 내용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힘을 얻은 저는 6.25동란 때 남부민초등학교 뒤 천마산에 예사로 산토끼가 뛰어놀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천마산 대원사 가는 길에 대규모 화단을 조성하고 그 아래 솔숲에 그물을 치고 산토끼를 방사하는 사업을 하기로 발표해서 전국의 매스컴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날마다 신문에 이름이 나 직원이 스크랩을 하기에 바빴습니다. 또 6.25당시에 산복도로로 흘러온 피난민 중 영감이 죽고 자식이 떠나 혼자 덩그렇게 남겨진 64명의 노파들이 95년 음력설엔 모처럼 영감제사를 지낼 수 있게 골목시장 생선도매상회장과 청과시장회장등과 연석회의를 거쳐 검정비닐봉투 하나에 칼치, 도미와 생선 5종을 담고 또 다른 봉투에 사과 등 다섯 종의 과일을 담고 오징어를 더 해 64명의 독거할머니에게 돌리니 <자갈치아지매>에서 난리가 나면서 부산서구청은 물론 어느 구청 전체보다도 이득수 동장이 근무하는 남부민1동이 매스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행정기관이 되었습니다. 

 사진1. 마흔 네 살 아기 동장(洞長) 필자
동장으로서 남부민1동 청년회에서 축사를 하는 필자

그러나 그런 영광도 잠깐 곧 이어 본격적 민선시대를 여는 구청장선거가 있는데 처음 선거일정이 발표되던 날 저의 후원자 이던 기획감사실장이 구청장을 모시고 만찬을 하면서

“여러분, 돼지는 잔칫날을 위해 살찌우고 여자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하고 옷을 벗는 겁니다. 이제껏 김아무개구청장 밑에서 살아온 우리는 금번 선거에서 우리 청장님이 이제 관선이 아닌 민선구청장으로 계속 근무할 수 있도록 우리의 충성을 모두 바쳐야 할 것입니다.”

하는 바람에 우렁차게 건배를 3회 복창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서구에 근무하다 북구로 옮겨간 전 구청장이 자기 집이 서구에 있다고 서구에 출마하기를 결심, 두 사람의 출신고등학교인 부산고등학교와 경남고등학교의 대결로 좁혀졌는데 당시 정계에 YS를 비롯한 경남고등학교 출신이 대세라 졸지에 경고 출신 전 구청장이 공천자가 되고 부산고출신 현 구청장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무원이 특별히 드러나게 선거운동을 못 하는 만큼 각종 행사나 모임에 공천에 낙마, 무소속에 출마한 김청장도 굉장히 유능하고 청렴한 공무원인줄 안다, 정도의 발언을 했는데 금방 사방에서 항의가 빗발치고 구청장 직무대리 부구청장에게서 행동에 신중을 기하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서구의 41명 사무관 이상 간부 중에 단 세 명 을 빼고 이미 모두가 공천자에게 넘어갔는데 탈락 김청장에게 충성을 맹서하던 기획실장이 앞장서서 대부대를 이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자기 말에 책임을 진 사람은 저와 아미동의 박주영동장(사무관동기), 그리고 김영식이라는 가정복지과장으로 성악을 전공해 늘 음악 속에 사는 그녀는 현실적 득실에 무심했고 인사권이 시청에 있어 구청에서 어쩌지 못 했습니다.

아무튼 여당일색의 전통 그대로 여당 공천자인 변모 구청장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나자 끝까지 의리를 지킨 세 사무관, 여자사무관은 시청으로 옮겨가고 아미동 박동장은 사표를 내고 저만 남게 되었는데 우선 하위직 인사 때 저와 뜻을 같이 한 6, 7급 말단직원 25명 정도가 시전 역에 소금처럼 뿌려지고 이제 구청의 수뇌부는 저를 정조준하게 시작했습니다.

이득수

당시 부산의 언론기관에는 시인으로서 산토끼를 방사한 꿈의 행정가도 독거노인이 제수(祭須)를 보내는 휴머니스트로 제 인기가 하늘을 찔러 당장 어쩌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많은 업무성과를 낸 남부민1동은 연말종합평가에서 다섯 개 부문별과 전체까지 여섯 개 과목 전체 꼴찌로 낙착되었습니다. 이 소도 웃을 일이 이 나라 풀뿌리 민주주의 단체장 선거가 몰고 온 첫 번째 폐해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연말 시정전체 인사이동 때 맨 마지막에 제 이름이 호명되었는데 테이프를 친 시장의 인사명령서 결제가 끝난 서류말미에 볼펜으로 간신히 <서구 지방행정사무관 이득수 중구근무를 명함>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이제 46세에 접어드는 한 사무관의 좌절,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크고 몸은 또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다음 회는 그 와중에서 술로 마음을 달래며 동료들과 이웃들과 아름다운 마을을 가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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