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백이 혼의 아내에게

에세이 제1094호(2020.9.14)

이득수 승인 2020.09.13 22:27 | 최종 수정 2020.09.13 22:49 의견 0
아내 홍성순 파우스티나와의 결혼식

나의 몸 주(主) 혼아, 나는 이제 나와 더불어 한 평생 내 혼을 보듬어 부여안은 나의 동반자이며 동업자인 혼의 아내, 그러니까 성모님을 섬기는 신앙심 깊은 파우스티나를 떠올리며 감사하고 싶다. 당신(어쩌면 나의) 아내인 그녀는 일생을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하고 의지한 단 한 명의 여인이자 말 못하는 나와도 가장 가깝고 절친한 의지자이며 동업자이며 서로가 서로를 위한 동반자였던 것 같다.

사실 나는 네 혼인 때, 네가 너무나 희고 고운 피부와 맑은 눈빛 당당한 걸음걸이를 가진 그녀를 만나 처음 대화를 하고 식사를 하며 웃을 때, 이 사랑이 이루어져 나의 혼이 저 아름다운 여인의 남편이 되어 그 껍데기인 내가 그녀의 옆에 서고 결혼을 해서 역시나 너의 껍데기인 내가 그녀의 옆 에 누워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은 일을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동안 외모나 인품이 파우스티나의 절반도 못 따라가는 수많은 아가씨들이 내 영혼인 몸 주인 너를 보고 너무 검고 못 생기고 직업과 체격이 다 변변치 않고 단지 하나 말을 썩 재미나게 하는 것은 필이 사기꾼이나 날나리일 것이라고 떠나버릴 때 나는 참으로 여러 번 통탄을 했다. 생각할수록 열심히 사는 인생, 인간의 오욕칠정에 다 귀 기울이고 남 아쉬운 일 같이 슬퍼하고 자신의 불행과 아픔을 의연히 딛고 일어서 늘 희망을 향해 달리는 네가 자랑스러웠지만 그저 외형과 물질에만 매달리는 당시의 경박한 젊은이들이 미웠고...

그녀와 결혼을 해서 신혼여행을 가던 밤, 그 첫 만남의 짜릿한 기분, 복숭아처럼 싱싱하고 건강한 향기가 나는 그녀의 살냄 새와 달콤한 목소리가 너무 좋아 나는 네가 잠든 후에도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오랫동안 몸을 뒤척여야 했다.

그리고 아이 둘을 낳아 키우면서 너는 끝없는 가시밭길, 현실이라는 삶의 현장을 맨발로 뛰어야 했고 나는 밤낮없이 너의 동반자자 밀착경호로 너를 보호했고 밤이 되어 귀가한 네가 아내 파우스티나의 환한 미소를 보며 손발을 씻고 세수를 하고 밥상앞에 앉을 때 내 엄지과 검지발가락 사이로 너무나 싱싱하고 청량한 바람이 행복이란 이름으로 지나가는 걸 느꼈고 젊은 부부의 뜨거운 순간이 끝나고 두 사람이 숨소리로 포근하게 잠이 들 때 나도 비로소 평온한 휴식에 들곤 했던 그 달콤한 밤들이 아직도 새롭다.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가득하지만 너무나 술책이 없어 늘 속고 실패하기를 거듭하던 네가 두 아이의 학부형이 된 서른일곱에 오래 근무한 성실공무원으로 뽑혀 설악산으로 <산업시찰>을 떠난 그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부산에서 가장 토착성이 강한 구 도심 동래구에서 동래고등학교 졸업생으로 똘똘 뭉쳐 난공불락 권력의 아성을 구축한 그들과 그들의 부인네들이 모두들 하하호호 웃으며 형님, 아우를 찾고 형수님와 사모님을 찾는 그 자리에 유일하게 한 번도 구청 근무를 안 해본 언양 출신 동직원 이득수, 장기근속 위로여행을 가지만 차안의 누구와도 친면이 없어 인솔자가 명단을 보고 이름을 부르면 모두가 원숭이처럼 바라보는 내 몸 주인 너는 산업시찰 팀을 구성할 때 평소에 구청장의 신임이 높거나 상을 타거나 동래바닥에서 무시못할 존재라고 19명을 뽑고 나머지 한 자리를 그야말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일만 하는 공무원을 뽑느라 연산동 동사무소 근무만 18년이라는 네가 뽑혔다고 동승한 사람들이 모두 마치 원숭이 쳐다보듯 너를 쳐다보다 옆자리에 앉은 선녀보다 눈부신 파우스티나를 바라보며 또 한 번 놀랐지. 그리고 설악산 울산바위 아래서 일행 전체가 손 두부와 머루주로 건배를 하고 너무 젊고 고운 이주사 부인에 참석 여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무어라 수근거릴 때 파우스티나는 너를 다래덩굴 뒤로 불러 

“당신이 그렇게 고독하고 힘들게 외톨이로 살아가는 줄 몰랐다. 이제 내가 당신을 어떻게든 출세를 시키고 남들보다 앞선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

고 말하고 부산에 돌아와 없는 돈을 털어 구두와 와이셔츠를 사고 양복을 맞추어 아침마다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손봐 사나이 자존심이라는 부풀린 스타일로 하루아침에 달라보이게 만들더니 남편이 바깥사회 사람들과 소통하고 주력부대에 포함되어 열심히 살아갈 수 있도록 온갖 자잘한 노력을 하던 일을 기억한다.

그리고 민선시대가 되어 조직이 확대되고 외롭게 책이나 읽는 실패한 소설가지망생의 꿈과 아이디어가 배어나는 기획서를 읽어본 안동유림 구청장과 고성유림 부구청장을 만나 하루아침에 서구청의 스타가 되고 감사계징, 기획계장이 되고 교통사고를 당한 몸으로 겨우 마흔네 살 어린 나이에 행정사무관의 고시에 합격하고 목민관인 동장이 된 너를 생각하면, 그 숨 가쁘게 달려가는 찬란한 승진가도를 바라보며 나도 내 몸 주인 네가 정말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었나 감탄하기도 했다.

장기근속 산업시찰 버스 속의 부부(1986년 설악산행)

그렇지만 그런 출세가도에서도 늘 검고 못 생긴 나, 껍데기인 백 때문에 고귀한 영혼 알맹이인 혼 너는 여러 번 눈에 보이지 않는 손해를 보았지만 늙어가는 얼굴을 거울 속으로 보며 늘 관대하게 웃었다. 순박한 촌놈이어서, 단지 그렇게 보임으로서 그 냉정하고 잔혹한 경쟁자들로부터 차마 제거까지 당하지는 않았다고 촌놈 같은 외모, 술 잘 먹고 어울리기 좋아하는 자기를 받쳐주는 하드웨어 백인 나 때문에 그렇게 견뎌온 것이라고 껄껄 웃을 때 나는 내가 감정을 가진 혼이라면 눈물을 흘릴 것 같았지만 단지 그렇게 기분 좋게 마시는 술을 삭히고 하룻밤 휴식의 잠자리에 든 너에게 다시 내일을 살아갈 에너지를 확보함에 진력했다.

이제 피차 늙고 병들이 혼과 백이 서로 무너지며 헤어지려는 판에 이러다 내가 평생을 연모해온 천사 파우스티나와도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그렇게 험한 세상을 살아온 너를 내가 온전히 보듬지 못하고 병의 질곡에 빠뜨리고 눈물로 간병하는 파우스티나를 바라보는 이 자책감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요즘 독한 항암제의 여파로 손가락발가락 틈이 다 헤어져 옳게 걷지도 못 하고 그러다 보니 허리 근육, 어깨근육이 다  탈이 나고 조금 밖에 걷지 못하는 너를 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동반자, 하루 종일 할아버지와 산책 한 번 나가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자 기다림인 진정한 또 하나의 파트너 우리 마초와의 이별도 예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요새는 발등과 발바닥을 치료하느라 혼인 너는 쿠션에 기대어 눕고 나 말고 또 하나의 분신 파우스티나가 환부를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는 것을 보면 나는 그만 눈물이 난다. 아이들 만화영화의 <라바>처럼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가 되고 겨우 꿈틀거리며 기는 정도의 행동으로 이 삶의 마지막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라바>에 나오는 뿔 달린 장수풍뎅이처럼 온갖 위험이 가득한 이 폐쇄된 공간에서.

그러나 나는 단 하루라도 더 너를 위해 버틸 것이고 아직도 남편을 살리려는 일념이 가득한 파우스티나를 바라보며 힘을 낼 것이다. 그래 내 몸주 혼이여, 혼의 아내 파우스티나여, 우리 힘을 내자, 힘을 내자.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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