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코로나19, 이 또한 지나가리라

에세이 제1099호(2020.9.19)

이득수 승인 2020.09.18 16:30 | 최종 수정 2020.09.18 16:53 의견 0
어릴 때 아빠 품에 안긴 아들 정석(42세)
어릴 때 아빠 품에 안긴 아들 정석(현재 42세)

첫 번째 방역을 잘 해 국회의원선거에 압승한 여당에게 제2차 대유행이 오자 전 국민은 다시 불안과 공포에 뜨는데 어찌 된 셈인지 대통령의 인가와 여야 인기도가 다시 대통령과 여당 중심으로 쏠린다고 하니 지금 문재인 정부는 위기 때마나다 코로나19가 살려내는 <코로나 정부>라는 생각이 다 듭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나쁜 의도가 아니고 반가운 이야깁니다. 어떤 경로든 누구의 인기가 올라가든 코로나19가 조금씩 잡혀간다는 그 자체가 우리 국민들에겐 무엇보다 반가운 일, 발을 뻗고 잠을 자고 가벼운 발길로 재래시장에 걸치나 꽃게를 사다 가족을 위한 저녁밥을 짓는 아내, 그래서 따뜻하고 포근한 저녁이 있는 가정만 유지가 된다면 말입니다.

요즘 점점 여기저기가 많이 아프고 힘이 떨어지면서 이 낙천적 마초할배도 가끔 산책길에서 혼자 긴 한숨을 쉬면서 내가 정말 이 막막한 코로나19의 바다를 건널 수 있을지,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가볍게 다녀오라고 등 떠밀어 내보낸 내 아들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르는 것입니다.

사실 아들의 해외주재가 회사에서 결정될 당시 모든 면에서 우리아들이 적임자인데 단 한 가지 늙고 병든 아버지가 있어 걸림돌이 되었답니다(그건 제 친구이자 아들의 회사동료의 아버지인 지인이 작년에 폐암에 걸려 단 8개월 만에 죽었기 때문에 더 절실했음). 그래서 아들도 차마 제 발로 가겠다고 나서기 어렵고 남들도 다 고개를 가로 젓는데 제가 

“아들아, 아무 걱정 없이 갔다 오너라. 먼 옛날 병든 아비를 두고 한양에 과거를 떠난다든지, 오랑캐를 무찌르는 번(番)을 쓰는 아들이 모두들 당연한 큰일(국사(國事)로 여기지 않았는가? 이 병든 늙은이가 젊은 아들의 전도를 막는다면 이는 아비가 자식을 돕기는커녕 그 장애물이 되는 것이니 내 건강 여부, 죽고살기를 떠난 너는 너 세대로서의 일과 희망을 위해 떠나거라.”

간곡히 부탁해 떠났고 인도와 한국이 그리 멀지 않아 작년 4월에 나가 두 번이나 왔다가서 지난 번 떠날 때 제대로 포옹도 한 번 안 했는데 문득 이렇게 상황이 최악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유치원에서 상황극을 하는 아들(환자)
유치원에서 상황극을 하는 아들(환자)

그리고 글쟁이 우리부자만이 가진 특별한 일로 무려 일만 쪽이 넘는 제 <대하소설 신불산>을 어떻게 마무리 하고 어떻게 출판을 할 지 부자가 이마를 맞대고 의논해 만약 평작(平作)이라도 제 평생과 우리가문 5-6대가 살아온 기록과 언양사람들의 숨결로 남아야 하고 조금만 명작(名作)의 요소가 있어도 가문의 자랑거리와 인세와 저작권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하는데 이제 저는 그만한 기력이 없고 아이는 멀리서 오지 못하니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한 번 왔다 한 번 가는 인생살이에 제가 죽는다고 해서 대한민국 인구통계나 주류소비량에 무슨 영향을 미칠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저처럼 가난한 가운데서 태어나 일생을 무엇인가 이루고 쟁취해야 된다는 투쟁심으로 살아오면서 좌충우돌 수많은 갈등과 질시 속에 간신히 살아남은 이 질긴 목숨, 공직자의 출세도 문학적 업적도 무엇 하나 내세울 바는 아니지만 그냥 덮어버리기에는 아까운 그 피땀의 세월, 그 의지의 나날이 세삼 이렇게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의 물결에 묻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영화나 연극포스트 귀퉁이의 <외다수(外多數)>가 된다는 것은 제 스스로 견대 낸 그 긴 세월의 우울과 고독, 내 4대 설움(외로움, 그리움, 안타까움, 서러움)의 감성의 <...움>을 다 어찌 해야 되는 것인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초인적 의지의 삶이 단순히 천연두나 페스트 같은 돌림병으로 죽다니, 한미(寒微)한데서 몸을 일으켜 몇 가지 조그만 성공한 일생과 감성이 모두 응축된 작은 구슬, 우황처럼 골병으로 굳은 집념 50년, 그것도 시한부생명이 되어서 좀 능숙해진 문학적 완성도가 어떤 결과물도 없이 문득 나치의 가스실에서 안네프랑크가 죽어가듯 어떤 배려나 특징, 표시도 없이 그냥 <외다수>로 죽고 말아야 하는가, 생각할수록 참으로 기가 막힌 것입니다.

개금 백병원의 체온검사대
개금 백병원의 체온검사대

오늘도 200여 명의 신규확진자가 발생했다는 뉴스와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의 넋이 나가고 진이 빠진 얼굴, 박능후보건복지장관의 공허한 눈빛, 그 많은 의사와 간호사와 의료기사들, 또 그 구비구비를 이겨낸 시장상인과 영세 사업자, 납품이 길이 막힌 양식장과 비닐하우스의 안타까운 경영인, 거기에 초기에 내 딸아이의 <명성만두>에 지장이 많지 않을까 걱정한 나날들(다행히 일군(一群)의 마니아에 의해 매상의 변화가 없음), 그리고 이리 저리 부대끼며 늘 바쁜 내 아내...

그러나 그 많은 노력에도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며느리와 두 아니는 낯선 궤도(軌道)를 돌고 있고 아들은 외톨이 행성(行星)으로 저만큼 혼자 반짝이며 이 병든 애비는 그 모든 안타까움으로, 늙은 아내는 그런 남편을 안타까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득수

우리가 군대생활을 할 때 온갖 기합과 구타가 횡행하던 그때에 우리는 <거꾸로 매달려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라 즐겨라.>라는 자세로 인내해 마침내 다들 제대를 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끈질긴 인내와 단합의 나라 자랑스런 한국인인 우리는 지금 또 한 번의 벽 앞에 서있지만 나는 언젠가 우리 모두가 이를 벗어나 환한 얼굴로 서로 손 잡을 날을 기대하고 있다.

 “코로나19, 이 역시 지나가리라!”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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