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마초고개의 노송(老松)이 사라지다

에세이 제1102호(2020.9.22)

이득수 승인 2020.09.21 21:56 | 최종 수정 2020.09.21 22:11 의견 0
덕고개의 마스코트가 된 풍치 좋은 노송(19. 6. 22)
덕고개의 마스코트가 된 풍치 좋은 노송

첫 번째 사진은 명촌리 남해부락에서 등억리 화천마을로 넘어가는 <덕고개>입니다. 조그만 야산너머 모래골에서 고래뜰로 직통하는 지방도가 뚫리기 전까지는 화천과 간월, 등억리긔 학생들이 길천초등학교에 등교하던 길이며 아주 옛날에는 간월사라는 등억리의 큰 절로 상북면 사람들이 넘어가던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명촌리로 처음 이사와 주로 넓은 도로위주로 지리를 익힌 저는 덕고개의 존재를 몰랐는데 우리 집 등말리에서 사광리 고래뜰을 거쳐 모래골못을 따라 도로를 한참 걸어가면 지금 <갤러리찻집>의 약간 윗부분에서 다시 명촌리의 안마을을 행해 비스듬한 묵은 도로가 있어 거의 마초와 저의 전용도로처럼 생각하고 휘움하게 구부러진 고개와 건너편의 포근한 남해마을이 정겹고 고개 입구에 커다란 노송이 하나 서 있어서 무엇인가 이름붙이기 좋아하는 마초할배가 재미사마 제 아호를 따서 <평리고개>로 부르기로 하고 여러 장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포토 에세이에 올리려고 보니 사진에는 모조리 우리마초가 겅중대며 뛰어가거나 오른쪽 다리를 들고 그 아름다운 노송의 발치에 실례를 하는 것뿐이어서 하는 수 없이 <마초고개>로 이름 지었는데 그 전에 골안못에서 순정리로 넘어가는 고개와 명촌리 성황당에서 골티마을로 넘어가는 호젓한 고개 두 곳을 이미 <제1마초고개>, <제2마초고개>로 지어버려 이번에는 자동으로 <제3마초고개>가 되고 말았습니다. 혜은이의 노래 <제3한강교>처럼 얼마나 그럴듯한 이름입니까?

집에서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하고 숨이 차면 이 <제3마초고개에서> 쉬어가기도 하는데 포장도로가 비바람에 씻겨 아주 말끔한 길바닥에 운동화와 양말도, 점퍼까지 벗고 비스듬히 누워 목덜미와 발가락사이에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푸근하게 펼쳐진 고래들과 맞은 편 능산마을과 화장산을 바라보는 재미가 여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렇게 무방비로 쉬는 상태에 할머니용 유모차에 삽과 분무기를 실은 80대의 노부부가 지나가며 저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혹시 등말리 사시지요? 박진수씨 처남?”

하며 말을 붙여왔습니다. 좁은 시골이라 벌써 저에 대한 호구조사는 마을 전체에 끝이 난 것 같았습니다. 모래골 맞은편에는 아까 말한 <갤러리찻집> 앞에 한300평 비탈 밭이 있어 노부부가 순전히 삽과 괭이로 농사를 짓고 그게 안타까운 아들이 커다란 냉동택배차를 가끔 샛길에 세우고 일을 도와주다 황급히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그분들도 저와 자주 마주며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옛날 덕고개를 넘어 모래골못을 돌아 아직도 죽은 말뼈가 나오는 강도고개를 넘어 화천마을로 놀러가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로소 그 고개가 아직도 등산지도에 남아있는 덕고개인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 중학교 동창 중에 그 덕고개를 넘어 10리가 넘은 길천국민학교에 등교하고 다시 20 리에 가까운 언양읍 어음리까지 노상 뛰어서 통학하던 친구들(누구랄 것도 없이 그 마을 아이들은 무조건 달리기를 잘 해 반대표 릴레이 선수였음)이 생각나 여전히 호감을 가지고 자주 넘어 다니며 쉬어가기도 하는 정거장 역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액대 최대 재앙인 코로나19와 기상관측 이래 제일 심했다는 긴 장마와 잇달아 들이닥친 바비, 마이삭, 하이션을 비롯한 세 개의 초강력 태풍에 정신이 없다가 모처럼 하늘이 개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 덕고개 산책을 나갔던 제가 뭔가 자꾸 허전한 생각이 들어 주변을 살펴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덕고개 또는 <제3마초고개>의 마스코트 노송이 도벌당한 것입니다. 그것도 나무의 뿌리를 캐 정원수로 살리려는 시도도 아니고 땅바닥 높이로 전기톱으로 잘라서 건너편 도랑둑에 화물차를 대고 잘려진 목재를 싣고 간 톱밥흔적이 역력했습니다. 나무등걸 자체가 가볍게 휘어지다 Y자를 이룬 모양으로 정원수, 조경수로는 더 없이 좋겠지만 너무 거목이라 이식이 어렵고 몸통이 굽어 사찰이나 기와집의 기둥감으로도 부적합해 장승이나 목공예 하는 사람이 베어 간 모양이었습니다. 몇 백 년의 긴 세월 덕고개를 지키며 일제시대에는 군수물자 송진을 공급하기 위해 온몸에 이등중사의 계급장처럼 빗금으로 칼금이 그어지며 명촌마을의 농부나 아낙의 땀에 젖고 한에 젖은 사연, 길천국민학고에 통학하던 수천 명의 학생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마스코트가 되었을 나무가 그렇게 하루아침에 싹둑 잘라지다니요.

도벌꾼의 손에 베어진 흔적

거기다 베어진 노송이 자기이름이 들어간 제3마초고개인 줄도 모르고 넓고 둥근 나이테가 드러난 발치에 철없는 마초는 한두 번 킁킁 냄새를 맡아보더니 이내 오른 쪽 다리를 들어 이제 아무 의미도 없는 영역표시를 하고 어서 집으로 가자고 서성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마을의 입구 부잣집무덤가에나 저런 노송이 한 둘 있어 마을자체의 풍치를 대표했고 혹시 누가 여름에 소를 매거나 가지를 꺾어 어지럽히면 엄청 혼이 나고 했습니다. 노송이야말로 마을주민의 기상이자 자부심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 어릴 적에는 산림계라고 해서 오토바이를 타고 도벌단속을 하는 사람을 순사보다 더 무서워해 나무로 밥을 해먹는 시골사람들은 대부분 한두 번 화목을 하다 들켜 산림법 위반으로 신원증명서가 나와 자녀의 취직이 어려운 전과자가 되기 쉬웠습니다.(삼남면 사무소 호적계에 잠깐 근무할 때 범죄인명부를 보니 우리 마을 내로라하는 유지들이 대부분 산림법 위반(도벌), 국세법위반(밀주)의 범죄인이라 깜짝 놀랐지만 지금까지 비밀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서성대는 마초
마초도 노송이 사라져 아쉬운 마음일까? 덕고개에서 노성이 섰던 곳을 돌아보는 마초.

아무튼 민법상 나무는 송죽(松竹)이라 하여 주로 소나무와 대나무를 재산가치로 여겨 그 도벌의 죄가 매우 중해 공무집행을 하던 저는 도벌에 대한 처벌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잘 자란 고목, 모양 좋은 노송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그 훔쳐간 나무로 장승이나 탁자 같은 가구를 만들어 무슨 영광을 보고 혹시 동니나 나지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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