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해질녘 때묻은 난닝구의 혼자 마시기

에세이 제1096호(2020.9.16)

이득수 승인 2020.09.15 22:08 | 최종 수정 2020.09.15 22:25 의견 0
런닝차림으로 소줏잔을 마주한 필자(연출)
런닝 차림으로 소줏잔을 마주한 필자(연출)

빈농의 차남으로 태어나 도무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저는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각오로 낯선 도시 부산과 복마전 공무원 생활을 해나가며 운 좋게 고운 아내를 만나고 착한 아이들을 낳아 원만한 가정과 생애의 계획(라이프사이클)을 세우고 한창 밀어붙이던 고비, 원숙한 중년으로 열심히 살아갈 때였습니다. 그렇게 내 인생 절호의 찬스에서 정상인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박해를 받고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젊은 날을 몽땅 바친 보스로 자신이 구청장공천에서 배제당한 뒤 공천 받은 전 구청장에게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 3/41의 의리파 사무관으로 당선된 구청장에게 반동으로 몰려 자신 때문에 중구청에 귀양까지 갔다온 심복인 나를 주변의 모함에 의해 하루아침에 안면을 바꾸고 '갈구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꿈을 꾸는 공무원으로서 또 부산시공무원문인회장으로 시 전체에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 나를 특별한 이유 없이 박해한다고, 사실은 경쟁자들이 윗사람도 모르는 오만한 시인이라 모함했지만 그렇다고 살아오던 스타일을 아부대열에 끼어 <시인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도 없어 전전긍긍하면서 구청장, 국장이상의 시청의 고위공직자들이 여럿 k구청장에게 시정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박해만 더 심해졌습니다. 심지어 같은 언양 출신으로 제 시를 매우 좋아하는 또 한 명의 김모 구청장은 공무원향우회에서 드잡이를 하면서까지 저을 구하려 했으나 이미 무투표당선으로 재선에 성공해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그는 이미 권력에 취한 악마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직원 하나 없는 신설 부서장이 되어 직원인사가 있을 때까지 한 일주일을 빈 방에서 혼자 지냈는데

“형님!”

누가 나를 접근하거나 만나는 일만으로도 소위 찍히는(권력으로 부터 외면당하는) 마당에 문화관광시절의 홍보담당 직원으로 당시 구청장 비서실장을 하는 박기도란 친구가 <축 영전>이란 화분을 들고 찾아오더니 이어 문화계장이던 이재식, 문화담당 정병진 씨, 사진기사 김종현 씨, 소위 <이득수 친위대 독수리 5인방>이 몰려온 것이었습니다.

여기 왜 왔느냐, 당신들도 나 때문에 찍혀 승진도 못 하면 어쩔거냐고 걱정했지만 저들은 나와 같이 한 2년을 보내며 축제를 활성화하고 문화재를 발굴하던 시절이 제일 보람 있고 행복한 시절이라 지금이라도 과장님과 같이 근무라면 지옥리라도 동행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퇴근길을 기다려 저녁과 술을 사고 노래방에 도우미를 붙여주고 주말이면 언양까지 천렵을 가서 버들치와 미꾸라지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먹고 그 남비를 모자처럼 쓰고 자갈돌을 두드리며 놀던 사람들이었지요. 

독수리5형제의 언양천렵 사진  
독수리 5형제의 언양 천렵  

그리고 또 한 사람 내가 이름도 모르는 사람하나가 커다란 화분을 보냈는데 알고 보니 문화관광시절 자주 출입하던 광고업자로 내 시를 좋아해 청장의 측근이 알기라도 하면 일감이 끊어질 각오를 하고 괴로운 나를 위로 하려했다는 화분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무관에서 서기관이 되려면 보통 8년에서 12년 정도가 걸려 제법 많은 업무성과를 내고 공무원문인회장으로서 시(市)전체에 두루 알려진 저는 진작 했어야할 승진을 두 번이나 나보다 후배 사무관에게 추월당하고 무려 13년차로 부산시 최고참 사무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6월말 다시 정기인사가 닥쳐 모두들 나보다 사무관 승진이 3년이나 늦은 총무과장보다는 내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구청 내 소문은 나는 또 다시 탈락 <방재안전과>라는 신설부서과장으로 내정되었다고 당시 총무과장이 정말 미안하다고 오늘은 인사발령을 깨는 오후 두 시보다 조금 일찍 퇴근해 집에서 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집에 들어온 나는 외손녀를 보러간 아내를 찾지도 않고 냉장고의 소주 한 병을 꺼냈습니다. 내가 술을 좋아하니 시장갈 때마다 뭐든 안주가 될 반찬을 조금씩 사고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소주 반 병 반주(飯酒)를 꼭 시키는 아내는 평소 냉장고에 재첩국, 추어탕, 명태탕, 족발 같은 안주감이나 해장국감을 떨어뜨리는 일이 없고 얼큰한 배추김치와 콩나물 조금과 마른 멸치를 넣은 일품 해장국을 참 잘 끓였습니다.

텅 빈 아파트의 오후 두시. 하마 구청에는 승진인사 나발을 불었을지 모르는 시간에 나는 와이셔츠를 벗고 때 묻은 난닝구차림으로 강소주와 배추김치를 안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한잔을 마시자 마치 예리한 칼로 식도와 위장을 베듯 짜릿한 아픔이 온 몸을 퍼져나가더니 두 잔을 마시자 마치 짜먹는 위장약을 먹은 것처럼 아픔이 완화되고 석 잔을 마시니 속이 편안해지면서 넉잔을 마시자 접시위의 배추이파리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기 시작했습다. 

참으로 열심히 살았지만 늘 눈치 없이 떨려나는 외로운 공직생활, 나는 세상 사람들이 다 나처럼 착하다고 믿는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제 이익만 챙기고 이 눈치 없는 시인의 진심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7잔이 조금 넘는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 다시 새 병을 꺼내 두어 잔을 더 마신 뒤 내가 그대로 식탁에 머리를 처박아 술병이 뒹굴어 식탁이 젖었는데 해질 무렵 집에 돌아온 아내가 무슨 일인지 짐작을 하고 얼큰한 김치해장국을 끓이며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명품 김장으로 소문난 아내의 배추김치. 여기에 고추가루를 풀고 멸치 한 줌을 넣으면 빙산도 녹일만한 해장국인 된다. 

그 며칠 뒤에 내가 그날의 상황을 한 편의 시로 썼는데 나름 저의 대표 시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애착이 가는 시라 문방구에 맡겨 시화를 만들어 연산로터리 산악회 사무실에 걸었는데 동년배로 부산대 화학과를 나온 박태주 교수와 양경석 사장, 선종욱 중국광조우현지신발회사 사장이 그 시를 보면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영화라면서 깔깔 웃었습니다. 다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남자라는 이유>를 공감하는 것이었지요.

 졸시 <獨酌1>를 올립니다.

 
獨酌1

거위간, 제비집에 샥스핀요리
미식가(美食家)들 별난 욕구 늘 못 채워도
쓸쓸한 해거름의 막소주 안주
한 접시 김치 쪽은 늘 맛의 절정(絶頂)

첫잔이 베고 나간 식도(食道)의 아림
슬그머니 덧칠하는 곰삭은 국물
석 잔에 배춧잎이 나비가 되고
넉 잔에 젓갈속의 멸치 떼가 헤엄치는
때 절은 남방차림 외로운 사내
눈앞에 펼쳐지는 초원(草原)과 바다.

열심히 살았지만 별 이룸(成功)없이
속은 듯 뺏긴 듯 허망한 生涯
다섯 잔, 반쯤 취해 감기는 눈에
꿈결처럼 스쳐가는 못난 사랑과
일곱 번째 잔 채우고 텅 빈 병처럼
우리네 삶 처음부터 허무한 건지
몽롱한 취중에 본 신기루(蜃氣樓)처럼
화려한 그 무엇이 있었던 건지...

마지막 잔에 담긴 유년(幼年)을 털어 넣고
슬그머니 엎드린 채 잠든 저 사내

...마침내 고향마을 닿았나보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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