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코로나, 똥바가지를 씌우다

에세이 제1097호(2020.9.17)

이득수 승인 2020.09.16 16:10 | 최종 수정 2020.09.16 16:35 의견 0

바야흐로 <코로나19>의 시대가 되었다. 눈을 뜨자 말자 마스크를 찾아 쓰고 가는 곳마다 발열검사를 하고 사무실, 마트,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들고나며 손소독제를 발라야 한다. 날마다 질병관리본부의 환자현황발표에 따라 일희일비를 거듭하는 사람들,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또 2,5단계를 언제 부터 실시하고 최악의 팬데믹에 대비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와 도시폐쇄 같은 최악의 조치는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전 국민은 이미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무엇보다도 다정히  손을 잡고 눈을 들여다보며 이야기하며 인정을 나누던 우리 한국인, 한 끼의 밥이나 한 잔의 술은 물론 다정한 이야기, 무심한 뒷담화로 삶의 활력을 찾던 그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침몰된 것이다. 수업이나 예배마저 2m, 2.5 혹은 3m로 떨어져야 하니 3m나 떨어진 거리라면 이제 우리라는 단어나 합동, 단체라는 단어도 사용할 형편이 아니다. 

똥바가지 이야기를 들려준 둘째누님(덕석에 환갑상을 차리고 들국화를 모습. 필자의 아이디어로 현장에서 연출) 
똥바가지 이야기를 들려준 둘째누님(덕석에 환갑상을 차리면서 들국화를 꽂은 화병을 함께 올렸다. 필자의 아이디어로 현장에서 연출) 

우리말에는 <곁>이라는 멋진 낱말이 있어 서로의 존재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거리를 말하는데 굳이 이수미의 노래제목 <내 곁에 있어 주>가 아니더라도 내 곁을 떠나다,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오다 하는 식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쓰는 그 곁이라는 따뜻한 단어가 이제 사라지게 되다니...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코로나>라는 말에 벌벌 떨고 나 또한 외출할 때마다 마스크를 쓰고 병원진료실에 도달하기 위해 하루 여러 번 체온을 재는 고생을 하면서도 정작 <코로나corona>라는 단어의 뜻을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화들짝 놀랬다. 그렇다. 코로나는 한국인에게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었다. 그건 우리가 청소년이던 6-70년대에 코로나라는 신형택시가 나와 반만년이나 지게목발 두드리며 살던 나라에 바야흐로 자동차의 시대를 열었고 언양읍에 딱 두 대 뿐인 그 코로나택시로 네 셋째누님은 명촌리로, 넷째누님은 장촌으로 시집을 가기도 했다.

그렇다면 <코로나>라는 말은 그라나다, 산타모, 산티페저럼 서유럽의 고풍스런 도시이름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정작 인터넷에 들어가니 코로나(corona)가 <크라운 crown> 즉 왕관이나 모자와 동의어임을 알게 되었다. 벼슬을 하거나 왕이 된다는 뜻의 이 코로나가 왜 하필 인류를 공포에 몰아넣는 위협적 바이러스명과 같을까? 그렇다면 코로나가 왕이 되고 세계인은 신민이 되어 벌벌 떨어야 한다는 것인데...

전에 한 번 이야기 한 것 같기도 하지만 내가 다섯 살 때 엄마 이상으로 나를 전심으로 돌보던 둘째 누님이 시집을 갔는데 당시 언양지방의 유일한 과수원인 진장만디의 <조두천씨 과수원,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의 생가)에 옥필이엄마라는 사람과 나란히 허술한 집의 방 한 칸짜리를 공짜로 쓰는 대신 농사일을 돕는 형태, 말하자면 반머슴 또는 협호(夾戶)개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어 말과 행동이 다 서툰 남편과 옥필이, 숙자, 옥희의 딸 셋과 진교라는 제 아버지보다 조금 더 장애가 심한 아들을 키우는 참으로 불행한 여인인 이 옥필이엄마가 얼마나 순수하고 다정하며 또 세상만사에 관심이 많은 지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단 하나의 이웃인 우리 누님과 친하다 못 해 줄줄이 태어난 아이 셋을 다 받아 키워주었다. 성격이 온순하면서도 식성이 까다로워 생선도 딱 마른 갈치와 가자미밖에 안 먹은 그 분은 세상 모든 스트레스를 우리 누님을 잡고 조근조근 끝없이 이어나가는 이야기로 풀었고 마침 누님과 같은 크리스천으로 교회에 가고 오고도 함께 하니 친자매 이상으로 가까웠다. 

여러 가지 마스크 견본
여러 가지 마스크

이야기와 입담이라면 대한민국의 2등도 억울할 정도로 열정적인 우리누님과 타고난 스토리테일러 옥필이엄마가 나눈 이야기를 당서 다섯에서 일곱 살을 거치며 매일 옆에 붙어서 들은 나도 그들에 결코 뒤지지 않아 지금도 그 때 들은 이야기가 기억에 선명한 게 몇 자락이나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똥바가지>의 이야기다.

옛날 조선시대에는 과거를 보아 벼슬을 하는 것이 유일무이한 엘리트코스에 출세의 지름길이었는데 언양읍이라야 과거를 본 사람은 당시의 현감에 진사 또는 초시로 불리는 지방의 선비 서넛뿐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2, 7일 언양장날에 귀미게가 붙은 털이 부실부실한 사냥꾼의 모자, 그걸 <호랑이감투> 또는 <호랑감태>라고 불렀는데 어떤 시골부자나 양반이 장을 보러 지나갈 때 누군가

“야, 호랑감투야!” 소리치며 모자를 씌우고 도망가면 그렇게 감투를 쓴 사람이 온 장바닥(아마 그 가까운데 에 떡집과 대폿집, 국수집이 있었을 것임)의 수십 명 때로는 백여 명의 장꾼들에게 막걸리와 떡, 국수를 대접하고 그 호랑감투를 잘 챙겼다가 다음이나 다다음 장날 자신처럼 방심한 시골부자에게 덮어씌우는 풍습이 있었다고 했다. 얼핏 들으면 말도 아닌 이 이야기를 잘 음미하면 역대 그 어려운 시대에 지식인과 부유층이 이행해야할 사회적 의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발상했다는 점, 그래서 그 옛날 언양이란 소읍에 흘러온 인간애의 소통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시대가 흐르고 촌구석으로 파고들면서 제법 밥술이나 먹고사는 중농이나 목수, 사냥꾼처럼 돈이 그리 귀하지 않은 사람이 지게를 지거나 빈손으로 우리 마을의 진장고개나 직동리의 고든골고개를 넘을 때 누가

똥바가지

“아나, 여기 있다. 똥바가지다!.”

하고 말만 똥바가지지 말끔한 조롱박에 자루를 씌운 <똥바가지>를 덮어씌우면 곧바로 삼이부제(앞집, 뒷집, 옆집 그러니까 한 마을)의 사람들을 모아 돼지나 닭을 잡고 떡을 찌고 막걸리를 말 떼기로 사와 흐벅진 회식을 베풀어야 했다는 것이다. 듣기에는 좀 거북해도 모처럼 곡기와 기름기를 먹어 영양실조를 이겨내는 우리 민족의 슬기나 인보정신이라고 볼 수 있는 그 호랑감투와 똥바가지에 해당되는 코로나(크라운)이 현대에 와선 왜 이렇게 무자비하고 으스스한 존재로 변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 것이다.(계속)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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