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간에는 우리 인간의 시대구분을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가 아닌 코로나19시대의 전과 후로 나누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떤 이들은 당분간 또는 영원히 우리가 이 코로나19바이러스를 이기기 힘든 만큼 국가나 민족개념이 아닌 코로나19에 관한 적응력, 또는 극복력을 기준으로 나름대로 유전적 특성에 따라 호흡기가 강한 사람, 어지간한 피로를 잘 이기는 사람, 웬만히 아파서는 잘 죽지 않은 불사신에 가까운 형태로 진화하여 그런 집단에 따라 새로운 패턴의 분류법이 나와 인간이 이제 더 이상 국가나 민족이라는 오래된 정치적 분류법이 아니라 코로나19에 적응이 강한 집단, 내병성이 좋은 집단, 치사율이 낮은 집단으로 분류되고 그들 중심으로 삶이 진행되는 새로운 사회구조가 탄생할지 모른다고 해 이 명촌리의 백두옹이 빙그레 웃어보기도 했다.
굳이 <반야심경>의 무시무종(無始無終) 유시유종(有始有終)의 철학이나 논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코로나19 역시 바이러스라는 생명체인 이상, 개체 또는 집단의 생성과 번영과 쇠락과 사멸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 그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될까?
나는 우선 정은경질병관리본부장이 그 때까지 마치 옛 월남전이나 중공근로자시절에 <의지의 한국인>처럼 건강하게 잘 살아남아 우리국민들에게 든든한 지지대와 의지처가 되고 박능후보건복지부 장관, 김강립차관을 비롯한 수많은 본부요원과 총리가 된 이후 단 한 번도 얼굴을 펴지 않는 정세균총리 마스크에 함몰되어 짙은 눈썹들만 번쩍이는 여당대표 이낙연, 야당대표 김종인 두 꼭짓점도 잘 버텨주어 서로가 서로를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다진 시간 위를 국민들이 편안한 하루하루를 지나면 좋겠고 전공의, 전문의, 개업의 할 것 없이 모든 의사와 간호사 병리검사나 물리치료를 하는 의료진이 우선 건강해야 할 것이다. 또 정은영본부장이나 박능후장관의 인터뷰를 국민에게 가장 실감 있게 전하려고 온갖 표정과 손짓을 아끼지 않은 수화통역사에게도 건강을 빌고 특히 얼굴이 넓고 하얀 여자 통역사님이 코로나19가 길어져 자기도 모르게 깊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그 표정이 그대로 굳어질까봐 하는 이 걱정에도 국민여러분들이 같이 여망을 보태어주기 바랍니다.
지금껏 인류가 살아오면서 인간 자신이 일으킨 그 치열하고 잔인했던 전쟁을 빼더라도 우리는 콜레라와 페스트라는 급속하고 용서 없는 돌림병을 맞아 인구 1/3이 죽는 사례를 두 번이나 경험했고 세계적 탐험가이자 영웅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질병의 역사로 보아서는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서양인들을 매독 같은 아메리카원주민들의 질병으로 죽게 하고 또 그 용감한 아파치족을 비롯한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인디언들이 유럽독감으로 죽는 대 재앙을 불러오기도 했다.
카톨릭이 왕성하던 시절처럼 만약 <마녀사냥>이 있다면 그 불길 속으로 가장 먼저 던져질 사람이 죄 없는 <잔 다르크>가 아니라 콜럼버스, 마젤란, 피사로 같은 항해가나 약탈자여야 한다. 좁은 공간에서의 연극과 영화상영, 노래방과 감성주점 등 각종 스포츠와 위락시설이 사라지더라도 우리 인간은 죽기 직전까지 결코 쾌락을 포기하지 않은 밴담(서양의 공리주의자), 양주(중국의 쾌락주의자), 트루게네프(허무주의자) 바쿠닝(무정부주의자)처럼 무언가 제 즐길 것을 찾아 나름대로 밀교와 같은 집회를 가질지 모르고 <저 사내나 여인은 자유롭게 성행위를 해도 코로나19의 감염위험이 없다>는 별 희한한 증명서나 자격증이 다 등장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 산복도로 달동네의 기울어진 판잣집의 노파들이 죽고 나면 그 빈집들은 어떻게 될까? 더 이상은 젊은 사람이 살지 않은 유령의 도시에 코로나19의 귀신이 커다란 까마귀나 노파처럼 소리 지르며 어둠속으로 날아다니는 악마의 땅으로 변하더라도 그 시절의 좀 더 게임문화에 진화된 눈만 빠끔한 어린이들이 휴대폰 하나씩 들고 에니메이션을 즐길지도 모른다.
그리고 16번 Mbn에서 방영하는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그들은 어떨까? 어쩌면 코로나로부터 가장 안전한 곳이 그들이 웅거하는 심산계곡의 판잣집이나 바위굴이라고 소문이나 심산에 <자연인의 집> 하나쯤 가져야 재산가로 취급받는 <자연인의 집>투자가 유행하고 이 골짝 저 골짝에 자꾸만 자연인들이 넘쳐나 마침내 자연인들의 난이 일어나고 그들의 인권을 보장하라고 광화문 앞에서 <자연인의 촛불집회>가 벌어질 줄도 모르겠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웃는 사람이 많겠지만 보라! 이 기막힌 사태에서도 우리 인간은 은밀한 웃음거리를 찾아내지 않는가? 따라서 우리는 코로나의 위협으로 울지만 말고 그 반대쪽의 작은 재미나 반사적 이익(마스크와 손소독재 상인>을 찾아 새로운 밥벌이를 기획해도 좋을 것이다. 위기 뒤에 찬스가 온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암만 그래도 말기암환자로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언제라도 한 이틀이면 올 수 있다고 떠난 내 아들이 이제 도무지 나를 만나러 올 수도 없고 나도 만나러 갈 수 없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역사가들이 난세와 태평성대를 나눌 때 전쟁이나 질병으로 아들이 먼저 죽어 아비가 아들을 묻는 <아, 목동아> 같은 경우가 바로 난세(亂世)며 동양의 노인들이 가장 큰 명예로 생각했던 와석종선(臥席終身), 즉 자녀들이 빠짐없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자리에 누워서 죽는 것을 성대(盛代)의 표본으로 쳤는데 이 평범한 늙은이 젊어 열심히 살고 병들었어도 여전히 부지런히 글을 쓰는 착한 영감이 아들 하나가 없는 와석종신을 할 수 없다면 누가 이 시대를 태평성대라 할 것인가?
아이들이 조금씩 커가면서 서울로 공부를 하러가는 자식도 있고 인도로 나가는 자식이 생길 때 나는 이득수라는 이 변변찮은 소행성이 열심히 탄력을 받아 이제 아들딸과 그 배우자와 손녀 넷의 대 가족을 아내와 내가 중심이 된 축(軸) 태양이 되고 늘 애교투성이의 조무래기 손녀들은 달이나 수성이나 샛별이 되고 아들딸과 상위는 목성, 토성, 천왕성, 명왕성이 되어 하나의 궤도 안에 10개의 별이 참으로 질서정연하게 소우주를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인도로 떠난 아들을 만날 수가(설령 내가 죽어도)없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힌다. 고국으로 돌아오긴 했어도 외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 집을 전전하는 두 손녀도 딱해 마치 샛별이 궤도를 이탈해 아무렇게나 돌고 있는 느낌 이고 내 아들은 우주미아가 되어 외롭게 혼자 떠돈다고 생각하면 마냥 슬프기만 하다.
그래. 그 또한 지나가리니 언젠가 코로나19가 물려나고 나는 내 아들의 품에 안기는 날이 올 것이다. 오고야 말 것이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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