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통영(統營) 신사 이승암, 그 단아한 삶과 죽음4

에시이 제1106호(2020.9.26)

이득수 승인 2020.09.25 18:09 | 최종 수정 2020.09.25 18:28 의견 0
지방의회에서 발언하는 5급 기획감사실장 필자(가운데), 왼쪽 뒤에는 이미 서기관으로 승진한 이승암 의회사무국장.

사람이 죽어가는 길에 있어 마치 다시 벌거숭이 갓난애로 돌아가듯 마침내 이빨이 다 빠지고 걷지도 못 하고 젖을 빨 듯 우유를 마시고 단것을 밝히며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다 마침내 말문을 닫고, 곡기(穀氣)를 끊고 사람을 못 알아보다 숨소리가 잦아지는 천수(天壽)를 다하고 와석종신(臥席終身)한 자들의 그 필연의 종점이나 갑자기 당한 교통사고나 발견이 늦은 말기의 암으로 눈을 뜨지 못 하거나 말을 하지 못할 경우에도 맨 마지막까지 청각, 그러니까 뇌와 가장 가까운 그 기능은 남아 있다고 한다. 

이렇게 유체이탈(遺體離脫)의 열명길에 든 자신에게 자식이나 친구나 이웃이 하는 사랑과 염려와 찬사와 오해와 갈등과 비방과 포폄의 말을 다 듣는다는데, 그렇지만 한마디 반응이나 반박도 못하고 그냥 듣다 죽어간다는데, 그렇다면 죽음의 호사라는 것은 그 마지막 감각인 청각, 즉 귀를 즐겁게 하고 가장 화려하던 시절의 음향과 음악,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면 더할 데 없이 좋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청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상실하고 죽음의 고샅길로 들어설 때, 그때 가장 듣고 싶고 가장 황홀하고 기분 좋은 음악은 어떤 것이 있을까? 어떤 음악을 들으면 굴곡이 많고 오욕에 젖은 내 삶이 보다 객관적인 하나의 풍경, 도랑가에 핀 찔레꽃이나 뱀 딸기처럼 무던하며 세상사 다 그렇듯이 나도 이렇게 살다가는구나 덤덤하고 의연해질까?
  
<아리랑>,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과 주기도문, <회심곡>, <반야바라밀다심경>,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이면 될까? 담담하게 삶을 되돌아보지만 끝내 아쉬움을 떨쳐내지 못 하여 가수의 이름마저 <여운>인 <과거는 흘러갔다>의 회한은 어떻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회상하는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간 <섬 집 아기>나 나의 살던 고향을 떠올리는 <고향의 봄>은 또 어떨까? 

개금 백병원의 코로나 열감지기에 화면에 비친 나의 모습. 나는 그럴 때 마다 내 영혼이 육체로 부터 탈출(유체이탈)하고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혼백을 상상하곤 했다.

또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운 미련이 남아>의 조용필의 <허공>이나 <파도는 영원한데 그런 사랑은 있을 수도 있으련만> 배호의 <파도>는 어떻고 저만치 물러서서 떠나가는 봄을 보는 듯 세상사에 달관한 것 같으면서도 끝내 아쉬움이 가득한 음조의 <봄날은 간다.>와 목이 메어 불러보는 이미자의 <황혼의 엘레지>는 어떨까?

그러나 죽음이 한갓 실패한 자의 변명처럼 아쉬움과 미련의 반추로 장식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마치 스페인이나 브라질에서 벌어진 요란한 축제의 메인스트리트를 행진하는 브라스밴드처럼, 50인조 오케스트라의 음향처럼 웅장하고 화려하며 활기차고 붕붕 뜨는 느낌이어야 할 것이다. 설령 이미 기억과 의식이 다 무너졌더라도 축제전야의 불꽃처럼 화려한 환청(幻聽)속에 눈을 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열명길에서 들을 마지막 음악, MP3에 저장해 이어폰으로 내게 꽂아주기 바란다면서 아들이나 아내에게 적어줄 곡명들은 어떤 것들이 될까? <라데츠키행진곡>, <경기병서곡>, <카르멘서곡 투우사입장의 노래> 같은 행진곡을 들으며 성공한 전쟁의 개선(凱旋), 생사를 넘나드는 절박함 속에서 아이러니하게 활기에 가득 찬 투우장의 소음을 듣는 것은 어떨까, 너무 경쾌해 다소 생뚱맞은 <콰이강의 다리>에서 나오는 휘파람소리는 또 어떨까?

사람이 죽어가는 길에 있어 마치 다시 벌거숭이 갓난애로 돌아가듯 마침내 이빨이 다 빠지고 걷지도 못 하고 젖을 빨 듯 우유를 마시고 단것을 밝히며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다 마침내 말문을 닫고, 곡기(穀氣)를 끊고 사람을 못 알아보다 숨소리가 잦아지는 천수(天壽)를 다하고 와석종신(臥席終身)한 자들의 그 필연의 종점이나 갑자기 당한 교통사고나 발견이 늦은 말기의 암으로 눈을 뜨지 못 하거나 말을 하지 못 할 경우에도 맨 마지막까지 청각, 그러니까 뇌와 가장 가까운 그 기능은 남아 있다고 한다. 이렇게 유체이탈(遺體離脫)의 열명길에 든 자신에게 자식이나 친구나 이웃이 하는 사랑과 염려와 찬사와 오해와 갈등과 비방과 포폄의 말을 다 듣는다는데, 그렇지만 한마디 반응이나 반박도 못 해보고 그냥 듣다 죽어간다는데, 그렇다면 죽음의 호사라는 것은 그 마지막 감각인 청각, 즉 귀를 즐겁게 하고 가장 화려하던 시절의 음향과 음악,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면 더 할 데 없이 좋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식음을 전폐한 뒤 말도 끊고 눈도 안 뜨는 상태에서도 살아 반응한다는 인체 마지막의 생존 장기(臟器) 귓속 달팽이관. [File:Anatomy of the Human Ear.svg: Chittka L, Brockmannderivative work jeawon135 / CC BY-SA /3.0]

내가 청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상실하고 죽음의 고샅길로 들어설 때, 그 때 가장 듣고 싶고 가장 황홀하고 기분 좋은 음악은 어떤 것이 있을까? 어떤 음악을 들으면 굴곡이 많고 오욕에 젖은 내 삶이 보다 객관적인 하나의 풍경, 도랑가에 핀 찔레꽃이나 뱀 딸기처럼 무던하며 세상사 다 그렇듯이 나도 이렇게 살다가는구나 덤덤하고 의연해질까?
 
그리고 마치 감당도 못하고 형언도 못할 엄청난 사연을 가진 듯 무겁디무거운 긁힘으로 읊조리다 마침내 오르가즘에 도달한 여인의 희열에 찬 외마디소리로 끊어지는 저 찬바람과 흰 눈과 우울(憂鬱)이 지배하는 나라 노르웨이의 사내 그리그의 <솔베이지 송>은 또 어떨까?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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