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장남, 장손병2

에세이 제1110호(2020.9.30)

이득수 승인 2020.09.29 22:22 | 최종 수정 2020.09.29 22:39 의견 0
우리 삼촌들이 한여름에 막걸리 안주로 물간 가자미회를 먹고 즉사했다는데, 콜레라 때문으로 짐작된다.

한 해 여름엔 하루 종일 배가 고파 먹는 일에 목숨을 건 가운데 두 삼촌이 물이 간 가자미회를 구해 막걸리를 마시다 즉사를 했는데(내 짐작으로는 콜레라 같음) 막내 우리 아버지가 울고 불며 이웃의 삽을 빌려와 묻으려고 하는 사이에 큰 아버지는 자신도 병에 옮으면 안 된다고 곧바로 지게를 벗고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천성으로 <얼굴이 희고 손이 부드럽고 성격이 유(柔)한> 것이 아니라 단지 게으르고 이기적일 뿐인 것이었지요.

제 아버지가 임종하기 얼마 전 평생을 되돌아보며 후회한 일이 그렇게 먹고살기가 바빠서 언양읍님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던 기미년 만세운동이 1919년 4월 2일 언양장터에서 벌어졌는데 그 게으로고 무능한 형과 형수를 먹여살리기 위해 독립만세 한 번 못 외치고 종일 시장바닥에서 대구와 청어를 팔았다는 얘기였습니다. 집안의 장손과 장남이 줄줄이 약하고 게으르게 태어나는 바람에 제대로 사람의 도리를 좀 해보려는 막내아들 우리아버지가 그렇게 고생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가운데 두 형이 죽고 형제가 남았는데 여전히 손가락 하나 꼼짝 않던 큰 아버지가 어느 해 겨울 아버지가 머슴을 살아 여남은 섬 쌀을 재어놓은 걸 보고 장가를 가겠다고 해서 결혼을 하고는 여전히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고 4남 1녀를 낳았답니다. 이어 28세 노총각인 우리 아버지도 결혼을 해서 해방 전후까지 자식을 다섯이나 낳았는데 세상에 태어나 무엇 하나 열심히 한 것 없는 큰 아버지가 덜렁 죽어버려(그 위에 큰 어머니가 전연 강단이 없어) 아버지는 할머니를 포함한 두 가정 열세 식구의 가장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화불단행으로 우리 사촌 큰 형님이 역시나 아비를 빼닮아 <얼굴이 희고 손이 부드럽고 성격이 유(柔)한> 사람이라 절대로 일을 할 생각을 않고 남의 대밭에 들어가 죽순을 따려다 주인이 오자 놀라 달아나다 대나무깔대기에 무릎이 찔려 제 때 치료를 못해 평생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되고 말았답니다. 그러면 둘째 형님이 부지런해야 되는데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뺨칠 정도로 더 확실한 <얼굴이 희고 손이 부드럽고 성격이 유(柔)한>사람이었답니다다. 결국 그 많은 식구들이 먹고살기 위해 아버지와 큰집의 셋째 형님이 같은 집에 큰 머슴과 꼴머슴으로 살며 조금씩 논밭을 사 모았다고 했습니다. 

내가 청소년이던 시절 아버지는 젊을 때의 과한 노동으로 이열(瘀血)이 들고 천식(喘息)이 덮쳐 농사를 못지어 애먼 내가 부지런한 셋째 사촌형님의 도움을 받아 농사를 지었는데 당시 사촌 큰형님은 어찌어찌 장날 저녁에 절룩거리며 장바닥을 쓰는 일을 맡아 상북면의 좀 모자라는 처녀에게 장가를 갔는데 거기서 겉만 멀쩡하고 셈이 부족한 남매와 외모까지 완전히 장애인의 모습이 비치는 막내딸을 낳고는 무슨 병으론가 덜렁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더욱 기가 찬 것은 그 시언찮은 아이 셋을 두고 사촌형수는 남편이 죽자말자 어디론가 재혼을 해서 1년도 안 되어 또 누군가의 아이를 밴 만삭의 몸으로 언양장터에 나타나기도 하고. 

그럼 이제 맏이가 된 셈인 둘째 사촌형은 어땠을까? 둘째 형님은 체격이나 외모마저 대대로 내려온 혈통인 <얼굴이 희고 손이 부드럽고 성격이 유(柔)한> 성격의 표본처럼 조그맣고 조용하고 말이 없지만 절대로 일을 않은 게으름뱅이였습니다. 해방 직후 모두가 먹고살 게 없어 밀기울과 대두(大豆)박(기름을 짜고난 콩껍질)을 넣고 밥을 먹는 판에 열대여섯이 되도록 도무지 일을 않아 우리 아버지가 같이 논에 가자고 하면  

“작은 아버지, 저는 몸이 약해 수금포(삽)를 못 들어요.”

나무를 하러가자고 하면

“저는 키가 작아 지게목발이 땅에 닿아요.”

절대로 따라나서는 일이 없어 

“그러면 너는 일을 한 하니 먹지도 말아라.”

고 호통을 치고 이튿날 같이 논에 가기로 단단히 약속했는데 자고나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20년을 객지로 떠돌다 서른일곱이 되던 해 웬 톱 한 자루를 들고 슬며시 나타났답니다. 그간 어떻게 살아온 지 물어보던 우리아버지가 

집 나간 지 20면 만에 빈손으로 돌아오던 4촌 형님이 무단히 이웃마을 길가집에서 들고 온 톱.

“그렇게 일도 않고 숨만 붙어서 돌아오면서 왜 남의 톱은 들고 오고 지랄이야?”

하자 머리를 긁적이며 이웃마을 길갓집에 도로 갖다 주고 왔다고 했습니다. 20년을 허송세월하고 아무것도 가져올 것이 없으니 길가의 톱을 하나 들고 온 것이었지요.

나이 꽉 찬 조카가 돌아왔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장가를 보내야 하는데 장남이 죽었으니 나중에는 장손에게 주어야할 조상답(우리 아버지와 셋째형님이 머슴살이를 해서 마련한) 두 필지 엿 마지기를 주어 양식을 삼게 했는데 그나마 언양읍에서 연탄장사를 하던 셋째 형님이 많이 도와주어야 간신히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평생 바쁜 일이 없고 힘든 일은 않고 자기 손에 들어온 것을 절대로 놓치는 일이 없이 살았지만 워낙 <얼굴이 희고 손이 부드럽고 성격이 유(柔)한> 귀족 스타일이라 마을에서 정승이라고 불렀는데 도무지 스트레스를 안 받는 성질이라 그런지 89세가 되도록 장수하다 죽었답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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