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장남, 장손병4

에세이 1112호(2020.10.2)

이득수 승인 2020.10.01 10:54 | 최종 수정 2020.10.01 11:15 의견 0

형님이 열여덟이 되던 해 마침내 끔찍한 장남의 병이 드러났다. 당시 기숙사의 급식이 아주 형편없어 한창 자랄 나이의 학생들은 대부분 집에서 돈을 보내와 빵을 사서 간식으로 보충했는데 우리 형님은 송금이 올 형편은 아니지만 그 동안 할머니와 어머니와 큰어머니에 세 명의 누님들에게 얼마나 고임을 받았는지 가난이나 배고픔에 적응이 잘 안되면서 깊고 깊은 자책감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 했다. 한창 자랄 나이의 영양실조가 위장병이 되고 다음은 우울증이 되고 마침내 조현병이 되어 학업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록 정신은 온전찮지만 얼굴이 하얀 장남을 위해 온 집안의 식구들이 숨소리를 죽였고 종일 노래를 하거나 중얼거리다 산과 들을 휘젓고 다니는 통에 7살짜리 내가 보호자가 되어 늘 형님을 따라다니다 집에 데리고 오는 일을 많았는데 어느 겨울날 형님은 35번 국도를 타고 광주의 외갓집을 향했고 30리 가까이 떨어진 통도사 앞에서 되돌아오던 나는 춥고 배가 고파 길 위에 쓰러졌는데 어느 버스기사가 구출했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정신이 돌아와 언양농업고등학교애 편입해 졸업한 형님은 곧바로 당시 창설 중인 농협에 들어가 경남의령에서 근무하다 입대했는데 김해에 있는 둘째 누님집에 갔다가 공씨성 가진 마을처녀를 만났는데 그 직업이 은행원 비슷해서 평생 흙 안 만지고 산다며 처녀 쪽에서 죽자살자 매달려 결혼을 했다.

그 사이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막내누님도 시집을 가고 열아홉 고3인 내가 삼남면사무소에서 퇴근한 어느 오후 형님은 조그만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본가로 돌아왔다. 그 좋은 농협을 왜 그만 두었냐니까 일 잘한다고 대부계에 배치를 받았는데 영농자금을 두루뭉실하게 대출해주고 커미션을 받아 조합장께 바치는 일이 도무지 감당이 안 되어 그랬다고 했다. 수많은 여인 틈에서 학처럼 고고하게 자라난 수재에게 그런 현실적 융통성이나 탄력은 있을 수 없었다.

우리 형님이 제일 겁을 낸 현금이 든 뇌물봉투

한 3,000평 정도 아버지가 물려준 농토를 일구려 했지만 힘에 부쳐 막걸리만 자꾸 마시더니 마침내 농사를 고만 두고 중등교사 국어과목 국가고시를 보아 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3년을 공부해 합격해 발령을 받는데 가까운 언양, 울산 다 놔두고 굳이 경북으로 근무지를 신청, 언양에서 제일 먼 영주중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언양바닥에서 천재로 알려진 사람이 가난한 집안, 배우지 못해 거친 어머니, 오롱조롱한 동생들 그리고 한 때 정신 줄을 놓았던 어두운 기억을 떨쳐내기 힘들어 다시는 언양땅을 밟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설과 추석, 집안에 무슨 행사가 있는 날은 모조리 숙직을 선다고 오지 않고 방학만 되면 형님은 강습을 가고 형수는 밥을 해 준다고 어머니와 조카 둘을 셋방살이 하는 우리 집으로 보냈다. 임시조치법으로 8필지의 3000평 정도 되는 논밭을 형수가 친척아저씨 한분과 짜고 해마다 조금씩 팔아가 우리가 결혼하던 겨울에 아버지 제사를 모시러 가니 집이 팔렸다고 했다. 왜 그렇게 급하게 파느냐니까 그냥 두면 동생들이 탐을 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형님의 장남병 그 끝없는 자존심에 가장 큰 상처를 입은 것은 우리가 결혼하던 해 가을 집에 쌀가마니가 즐비하자 어머니가 셋방 사는 동생 한 가마니 주라고 하니 장가 간 놈이 큰집 살림 탐내는 건 용서할 수 없다며 집단에 불을 붙여 큰 채 지붕에 던져 온 마을 사람이 불을 꺼야 했던 일이다. 
 
그리고 제대한 막내의 취직이든 결혼이든 절대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작은 형도 형이니까 형이 좀 알아서 하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구포의 기술학교에서 밀링을 가르치고 현대자동차에 취직을 시켜 청도 출신 아가씨와 결혼을 시키는데 어머니를 모시고 부산까지 가는 게 번거롭다고 형님형수내외만 오겠다고 했다.  

일본말 뇌물인 '와이로' 또는 '사바사바'의 어원이 된 고등어

임시조치 때 형제들이 벌떼처럼 대들어 논 200평을 막내에게 떼 준 것도 막내가 군에 갔을 때 귀신처럼 팔아먹어 혼수비용도 쬐금 밖에 주지 않아 박봉의 아내가 죽을 고생을 해 구색을 갖추고 내가 근무지의 예식장을 싸게 빌려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어느새 부조함을 챙긴 형수가 그걸 통째로 들고 영주로 가버렸다. 형수는 무식해서 돈 밖에 모르는 거지만 많이 배운 형님은 무서운 장남병에 걸려 오로지 자기가 편하고 좋은 것만 자기 자존심 안 상하는 일만 알고 아우나 형제의 애로사항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아내의 만행(蠻行)을 수수방관한 것이었다.

울산에 단간 방을 얻어 동생의 살림을 내어주는 날 돈이 떨어진 우리 내외는 우리가 쓰던 식기 두벌에 수저 두벌과 밥솥을 하나 사서 간장, 된장, 고추장을 조금 퍼내어 살림을 내고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밥을 해 먹은 뒤 돌아오면서 부엌에 연탄이 없는 걸 보고 내외가 돈을 탈탈 털어 연탄 100장도 못 되는 70여 장을 넣어주고 울면서 부산으로 돌아왔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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