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끝없는 비극 장남병의 유전6

에세이 제1115호(2020.10.5)

이득수 승인 2020.10.05 06:20 | 최종 수정 2020.10.05 06:54 의견 0

형님이 3년 가까이 제법 긴 세월 폐암을 앓아 가족들이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지 크게 슬퍼하는 사람도 없이 그나마 손위인 누님 두 분이 자주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다. 특히 김해의 순찬씨는 자기 때문에 맺어진 혼사로 너무 돈만 알고 사람도리를 모르는 큰며느리를 바라보며 회한의 한숨을 쉬었다. 혼담이 성립될 때 결혼만 하면 교회에 다닌다고 하고서 단 한 번도 간 일이 없이 조상이 머슴 살아 마련한 땅과 집터를 송곳하나 꽂을 자리 없이 팔아먹은 것이 꼭 자신이 저지른 것 같이 간이 오그라든다고 했다. 

그러나 바로 손아래 동생인 셋째 누님은 형님이 조현병으로 천지간을 방황할 때 부산 보수동의 약방집할매를 돌보며 식모살이를 했는데 어느 날 대문 앞에서 뱀을 비롯한 온갖 약재를 파는 약장사가 철수한 뒤 미처 챙기지 못하고 남겨진 돈주머니(전대)을 발견하고 가슴이 덜렁덜렁하는데 순간 천지를 떠돌던 형님이 나타나
“자야!”
하고 부르는 바람에 깜짝 놀라 자신이 아무것도 줄 수 없음을 알고 무심코 그 돈주머니를 주어버린 셋째 금찬씨의 입장은 달랐다.

옛날 남자 장사꾼의 돈주머니 전대(纏帶)

그 후 정신을 수습한 형님이 직장을 다닐 때 20살이 된 누님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노마이>라고 부르는 양복을 반드시 혼수로 해주어야 했는데 처남이 농협에 다녀 현금이 돌아가니 반드시 양복을 해줄 줄 알았는데 형은 누님이 간신히 꺼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묵살했다. 

귀한 몸인 자신 외에는 사정을 살피거나 배려하는 인성자체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누님은 자영이 술만 취하면 심하게 구박해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 두서면인가 어디서 양복을 못 해주고 시집을 간 새색시가 하도 시집에서 시달리자 그만 목을 매어 출상하는 날 친정집 오빠들이 줄을 지어 “노마이, 노마이!”라고 소리치며 상여 뒤를 따라갔다는 이야기가 언양장터에 돌기도 했다.
 
그리고 8년이 지나 막내누님이 결혼을 할 때는 양복을 해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시대라 자기네 박서방의 양복도 같이 한번 해주라고 형님과 형수 앞에 눈물로 호소를 해도 도무지 반응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보수동 집 앞에서 주운 돈주머니를 오빠에게 준 이튿날 약장사 영감이 완전히 얼이 빠진 얼굴로 골목길을 날마다 서성거리다 길바닥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이야기를 하자 형님은 잠시 눈이 반짝이는데 형수는 하나 시집보내기도 힘든데 지나간 양복을 하는 바보가 어딨느냐고 동갑짜리 시누이를 울렸다. 본래 양심 없이 돈이나 밝히는 아내의 등 뒤에 숨은 소심한 천재에게 형제자매를 위한 인정이나 배려는 아예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수십 년 수많은 여인들에 둘러싸여 오로지 <원질>로 불린 자신의 자존심 외에는...

그런데 개울에 유골을 뿌리고 식당에서 조객들과 함께 밥을 먹는데 옆으로 다가온 조카 우현이가 
“잔아부지, 저는 인자 교도관을 그만 둘까 합니다.”
하고 너무나 크고 선한 눈빛으로 말해
“갑자기 다니는 직장을 왜?”
“사실 직장에 다닐 맘이 전혀 없었지만 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다녔어요. 이제 아버지가 안 계시니...”
“무슨 소리? 이제 니가 아버지 몫까지 하면서 어머니와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지.”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갔다.

저녁에 아내에게 이야기를 하니 
“그 애는 평생 기분 좋게 출근한 날이 하루도 없었답니다. 왜 당신집안의 그 얼굴이 희고 부드럽고 성격이 유한 데다 게으르고 남의 사정 생각 안 하고 억지로 편해도 제 몸만 편하면서도 늘 우울하여 노이로제에 빠지는 성격 말입니다. 그애의 성격으로 보아 아마 장례를 치기 전에 사직서부터 먼저 작성해 놓았을 것입니다.”
했다.

 어릴 적 우리마을 공동묘지가 있었던 진장만디

우리 집 계통의 장손인 우현이가 태어났을 때 우리 큰어머니와 어머니, 나이 든 두 고모에 제 어미 형수까지 장손이 태어났다고 얼마나 홅고 빨고 둥기둥기 키웠는지 그는 세상이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있는 것으로 알았다. 

아버지를 닮아 공부를 꽤 했는데 고3때 입시강박으로 노이로제와 대인기피증에 걸려 병원치료를 하고 굿을 하느라 엄청 많은 돈이 들어 시골재산 타 팔아가 사치나 하고 지낸 일을 모두 우현이병원비에 들어갔다고 형수가 우길 빌미를 만들어주었다.

간신히 서울의 중간급 대학에 입학해 한 학기쯤 다니던 그 애는 대인공포증이 점점 심해 학교를 그만 두고 부산 작은집에 바람이나 쏘이러 온다고 오다 충무동 재건센터의 버스 정류소의 매표하는 아가씨에 홀딱 빠져 우리 집에는 오지도 않고 무직자 신세로 결혼을 했고 아이가 둘이나 태어난 뒤 교도관에 들어가기는 했는데 아비가 술을 먹고 교장에 대들듯이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지각이나 조퇴결근을 안 하면 두드러기라도 나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가 사표를 내면 말이라도 한 번 더 생각해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우리 할아버지 대에서 시작된 게으르고 소심하며 자기 몸만 편하면 되는 <장남병, 장손병>이 큰아버지와 사촌형과 우리형님을 지나 마침내 나보다 손아래인 조카에게까지 나타난 것이었다.

<시인·소설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