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 또는 만혼이 들불처럼 번지는 시대라 우리 연배에서 일찍 사위나 며느리를 보아 손주재미를 보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고 영광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손주는커녕 남의 식구를 구경도 못 해본 동년배들은 손녀이야기가 나오는 자체가 스트레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심신이 많이 망가진 시골노인 마초할배가 여전히 힘을 내어 삶의 끈을 놓지 않는 저력의 대부분이 8 9세 또래의 세 손녀들의 덕분인 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내와 보물상자의 주인공인 세는 나이 9세의 가화(친손녀), 현서(외손녀)와 한 살 아래 우화의 트리오는 우리 내외에게 마치 커다란 보석상자처럼 시도 때도 없이 갖가지 기쁨을 주는 살림밑천이자 전재산입니다.
그 중 맞이 격인 친손녀 가화(嘉禾)는 상서로운 벼이삭이라는 뜻, 옛 왕조시절 풍년과 태평성대의 상징이란 뜻처럼 우선 체격부터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공부와 운동, 춤 노래는 물론 시와 동화도 잘 짓고 그림솜씨가 매우 뛰어난 팔방미인입니다. 그러나 너무 조숙한 느낌이 있을 정도로 덩치가 크고 좀 무리한 경쟁심이랄까 모든 걸 자기가 다 잘 하고 남을 이겨야 된다는 욕심이 강해 우리 내외와 제 부모는 그 아이가 점점 자라나면서 성격이 점점 부드럽고 여성스러워지면서 한두 가지의 뛰어난 재주로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둘째 외손녀 현서는 다행히 얼굴이 저를 닮지 않아 나중에 유일하게 성형외과의 도움 없이 남자친구를 사귈만한 또록또록한 외모라 특히 제가 귀하게 여기는데 문제는 언어능력이 좀 처지면서 낯설고 새로운 일에 대한 공포심이 있어 우리 가족은 그 애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려고 엄청나게 노력중인데 제 또래 제 4촌들과 어울리면서 많은 부분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한글의 이해와 맞춤법, 특히 받침이 있는 글자를 많이 어려워하지만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 상태에서도 시재(詩材)가 뛰어나 그 애가 뭐라고 중얼거리거나 개발새발 써놓은 글을 제 어미가 대충 정리를 하면 감히 누구도 흉내를 내지 못 할 멋진 시가 탄생해 이 할아버지마저 감탄하게 합니다. 앞으로 자신만만한 처녀로 자라 훌륭한 시인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지막 우화(羽化)라는 아이는 자기 언니보다 체격이나 힘, 용감성도 떨어지고 무서움도 많이 타는 연약한 아이로 보이고 자기의사표시가 없이 늘 조용하지만 노래든 시든, 영어회화든 무엇이든 한번 꺼내놓으면 제법 한 가닥을 하는 언니에 조금도 뒤지지 않아 제 어미나 언니가 혀를 내두르는데 그렇다고 그걸 뽐내는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점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특별히 춤을 잘 추어, 할아버지가 보는 <가요무대>에 나오는 트로트에 제 스스로 알아서 추는 춤이 그렇게 멋지고 울림이 있어 마치 신이 들린 듯 무언가 알 수 없는 신비와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네 살 때 나름 시를 쓸 정도로 글짓기(주로 시 같은 산문이나 산문 같은 시)를 잘 쓰는데 한참 새겨보면 참으로 의미가 깊은 훌륭한 글인데 이상하게도 하나의 감흥이나 끌림이 없이 매우 건조한 문체라는 점입니다. 언어적 소질이 많은 우리 선친아래의 두 형제 형님과 저는 둘 다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우리 집안에는 우리 형님은 백일장에 나가면 상도 잘 받는 모범답안을 내는 대신에 한 줄의 씨가 붓이 아닌 칼로 새긴 것처럼 정확하고 비정하여 따뜻한 인간의 정이 없고 저는 오히려 감성이 지나친 감이 있는데 제 아들이 이상하게 아비가 아닌 큰아버지를 닮아 그저 논술시험 만점용 모범답안 같은 정확하고 건조한 문장을 쓰는 편인데 이 우화란 영리한 녀석의 문장이 제 아비를 닮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글이 늦은 현서가 가끔 던지는 시어는 놀아울 만큼 저를 닮아 제 어미가 정서를 해보면 폐부를 찌르는 뭔가가 있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새벽잠이 없이 일찍 일어나 새벽의 맑은 정신으로 그날 치 공부를 거의 다 해치우는 집안의 전통(우리 형제와 아들)을 이 막내녀석이 닮아 명절에 집에서 같이 잘 때 새벽 다섯 시경에 일어난 제가 컴퓨터를 켜고 글을 써나가기 시작하면 어느 새
“할아버지!”
여리고 부드러운 손과 팔뚝으로 스킨쉽을 쳐다보며 인사를 하고는 제 바로 옆에 앉아 컴퓨터의 만화영화나 음악을 즐긴느데 올해추석은 한동안
“아싸라비아, 콜롬비아!
아싸라비아, 콜롬비아!“
하도 반복해서 듣는지라 어느 새 저도 따라하다 합창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 그 애의 창작욕이 불타오르면
“할아버지!”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키면 컴퓨터를 내어달라는 말로 의자를 비켜주면 금방 글 한편씩을 쓰는데 올해 추석도 뭔가 그럴 듯하면서도 참으로 감칠맛이 없는 밋밋한 글 한편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아버지의 두 서재와 서가의 책들을 무척 좋아하고 늘 관심을 가지고 제목을 읽어보는 것이 저의 마음을 늘 만족하게 합니다.
그 애가 쓴 산문과 함께 올 추석에 남긴 사진 몇 컷을 올립니다.
제목: 우리 강아지 마초 / 이우화
우리 마초는 울산 할아버지네 강아지다.
그래서 우리 강아지 마초는 귀엽다.
하지만 마초는 자기 생활을 즐길지 모르는 것 같다.
내가 낚시를 갔을 때 마초는 내 앞에서 물만 먹는다.
그리고 맨날 내가 간식을 줘야한다.
그래서 마초는 인생의 재미를 모르는 것 같다. 끝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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