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손녀자랑 대(大) 방출

에세이 제1119호(2020.10.9)

이득수 승인 2020.10.08 20:04 | 최종 수정 2020.10.08 20:19 의견 0
저도 모르게 부산아파트의 서재 평리재의 서가 사이에 올라가 책을 읽는 우화(羽化)
저도 모르게 부산 아파트의 서재 평리재의 서가 사이에 올라가 책을 읽는 우화(羽化)

비혼, 또는 만혼이 들불처럼 번지는 시대라 우리 연배에서 일찍 사위나 며느리를 보아 손주재미를 보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고 영광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손주는커녕 남의 식구를 구경도 못 해본 동년배들은 손녀이야기가 나오는 자체가 스트레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심신이 많이 망가진 시골노인 마초할배가 여전히 힘을 내어 삶의 끈을 놓지 않는 저력의 대부분이 8 9세 또래의 세 손녀들의 덕분인 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내와 보물상자의 주인공인 세는 나이 9세의 가화(친손녀), 현서(외손녀)와 한 살 아래 우화의 트리오는 우리 내외에게 마치 커다란 보석상자처럼 시도 때도 없이 갖가지 기쁨을 주는 살림밑천이자 전재산입니다. 

그 중 맞이 격인 친손녀 가화(嘉禾)는 상서로운 벼이삭이라는 뜻, 옛 왕조시절 풍년과 태평성대의 상징이란 뜻처럼 우선 체격부터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공부와 운동, 춤 노래는 물론 시와 동화도 잘 짓고 그림솜씨가 매우 뛰어난 팔방미인입니다. 그러나 너무 조숙한 느낌이 있을 정도로 덩치가 크고 좀 무리한 경쟁심이랄까 모든 걸 자기가 다 잘 하고 남을 이겨야 된다는 욕심이 강해 우리 내외와 제 부모는 그 아이가 점점 자라나면서  성격이 점점 부드럽고 여성스러워지면서 한두 가지의 뛰어난 재주로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둘째 외손녀 현서는 다행히 얼굴이 저를 닮지 않아 나중에 유일하게 성형외과의 도움 없이 남자친구를 사귈만한 또록또록한 외모라 특히 제가 귀하게 여기는데 문제는 언어능력이 좀 처지면서 낯설고 새로운 일에 대한 공포심이 있어 우리 가족은 그 애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려고 엄청나게 노력중인데 제 또래 제 4촌들과 어울리면서 많은 부분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한글의 이해와 맞춤법, 특히 받침이 있는 글자를 많이 어려워하지만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 상태에서도 시재(詩材)가 뛰어나 그 애가 뭐라고 중얼거리거나 개발새발 써놓은 글을 제 어미가 대충 정리를 하면 감히 누구도 흉내를 내지 못 할 멋진 시가 탄생해 이 할아버지마저 감탄하게 합니다. 앞으로 자신만만한 처녀로 자라 훌륭한 시인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추석이튿날 제 생일케이크의 촛불을 부는 모습
추석 이튿날 제 생일 케이크를 자르는 우화

마지막 우화(羽化)라는 아이는 자기 언니보다 체격이나 힘, 용감성도 떨어지고 무서움도 많이 타는 연약한 아이로 보이고 자기의사표시가 없이 늘 조용하지만 노래든 시든, 영어회화든 무엇이든 한번 꺼내놓으면 제법 한 가닥을 하는 언니에 조금도 뒤지지 않아 제 어미나 언니가 혀를 내두르는데 그렇다고 그걸 뽐내는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점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특별히 춤을 잘 추어, 할아버지가 보는 <가요무대>에 나오는 트로트에 제 스스로 알아서 추는 춤이 그렇게 멋지고 울림이 있어 마치 신이 들린 듯 무언가 알 수 없는 신비와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네 살 때 나름 시를 쓸 정도로 글짓기(주로 시 같은 산문이나 산문 같은 시)를 잘 쓰는데 한참 새겨보면 참으로 의미가 깊은 훌륭한 글인데 이상하게도 하나의 감흥이나 끌림이 없이 매우 건조한 문체라는 점입니다. 언어적 소질이 많은 우리 선친아래의 두 형제 형님과 저는 둘 다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우리 집안에는 우리 형님은 백일장에 나가면 상도 잘 받는 모범답안을 내는 대신에 한 줄의 씨가 붓이 아닌 칼로 새긴 것처럼 정확하고 비정하여 따뜻한 인간의 정이 없고 저는 오히려 감성이 지나친 감이 있는데 제 아들이 이상하게 아비가 아닌 큰아버지를 닮아 그저 논술시험 만점용 모범답안 같은 정확하고 건조한 문장을 쓰는 편인데 이 우화란 영리한 녀석의 문장이 제 아비를 닮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글이 늦은 현서가 가끔 던지는 시어는 놀아울 만큼 저를 닮아 제 어미가 정서를 해보면 폐부를 찌르는 뭔가가 있고요.

가을꽃이 가득한 명촌별서에 물을 주며 노는 모습
가을꽃이 가득한 명촌별서에 물을 주며 노는 세 손녀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새벽잠이 없이 일찍 일어나 새벽의 맑은 정신으로 그날 치 공부를 거의 다 해치우는 집안의 전통(우리 형제와 아들)을 이 막내녀석이 닮아 명절에 집에서 같이 잘 때 새벽 다섯 시경에 일어난 제가 컴퓨터를 켜고 글을 써나가기 시작하면 어느 새
“할아버지!”

여리고 부드러운 손과 팔뚝으로 스킨쉽을 쳐다보며 인사를 하고는 제 바로 옆에 앉아 컴퓨터의 만화영화나 음악을 즐긴느데 올해추석은 한동안
“아싸라비아, 콜롬비아!
 아싸라비아, 콜롬비아!“

하도 반복해서 듣는지라 어느 새 저도 따라하다 합창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 그 애의 창작욕이 불타오르면 
“할아버지!”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키면 컴퓨터를 내어달라는 말로 의자를 비켜주면 금방 글 한편씩을 쓰는데 올해 추석도 뭔가 그럴 듯하면서도 참으로 감칠맛이 없는 밋밋한 글 한편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아버지의 두 서재와 서가의 책들을 무척 좋아하고 늘 관심을 가지고 제목을 읽어보는 것이 저의 마음을 늘 만족하게 합니다.

그 애가 쓴 산문과 함께 올 추석에 남긴 사진 몇 컷을 올립니다. 

   제목: 우리 강아지 마초 / 이우화

우리 마초는 울산 할아버지네 강아지다. 
그래서 우리 강아지 마초는 귀엽다. 
하지만 마초는 자기 생활을 즐길지 모르는 것 같다.
내가 낚시를 갔을 때 마초는 내 앞에서 물만 먹는다.
그리고 맨날 내가 간식을 줘야한다. 
그래서 마초는 인생의 재미를 모르는 것 같다. 끝

 <시인·소설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