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연산동 고분군에는 누가 잠들었을까?2

에세이 제1121호(2020.10.11)

이득수 승인 2020.10.10 16:22 | 최종 수정 2020.10.11 23:43 의견 0

그러면 왜 같은 산 하나를 두고 두 가지 혹은 세 가지의 산명(山名)이 생긴 것일까요? 그건 같은 산이라도 각각 쳐다보는 방향에 따라서 그 생긴 모습이 다를 수 있어 선사시대의 취락이나 후대의 자연부락에 살던 사람들이 마을단위로 저들끼리 통용되는 고유한 산 이름을 붙였는데 남서쪽인 지금의 연산2,3,4,5,6동 쪽에서는 배산으로, 북쪽인 1,8,9동 쪽에서는 잘미산으로 부르게 된 모양입니다.(사실 영남알프스의 신불산도 동쪽인 언양, 삼남사람들은 신불산으로 부르지만 그 북쪽에 사는 상북면 사람들은 신불산의 공룡능선과 칼바위 일대를 간월산이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약간 높은 두개의 봉우리가 마주 보는 밋밋한 모습의 배산꼭대기를 보고 고대인들은 어떻게 잔의 형상을 연상하고 배산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아무리 요리조리 뜯어보아도 도무지 평범한 물 컵이나 소주잔, 로맨틱한 와인그라스나 막걸리나 전통주를 마시는 막사발을 연상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인의 잔은 지금의 물 컵이 아닌 술잔, 그것도 반드시 제사에 쓰는 잔, 즉 의식(儀式)용 제기(祭器)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인터넷을 검색하면 부산의 배산국은 아니지만 김천지방에도 꼭 같은 잔 배(盃)자 배산국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잔 배자가 흔히 쓰여 거기에도 비슷한 산이 있고 그런 소왕국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옛날의 술잔이 마치 나막신처럼 가운데가 오목하고 양끝이 뾰족한 -지금 멀리서 배산을 보는 듯한- 형상이었을까요? 설마 구두나 하이힐에 술은 부어 아랫사람에게 강제로 먹이는 악동들의 술버릇이 그 때에도 있었던 걸까요? 

현대의 하이힐을 닮은 마두식각배(馬頭式脚背)
현대의 하이힐을 닮은 마두식각배(馬頭式脚背)

여기서 우리는 잠시 시각을 바꾸어 고고학의 행간이나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마두식각배(馬頭式脚盃), 즉 말머리 장식에 말 다리의 굽이 있는 술잔의 사진(현 동아대박물관 소장)을 보면 ‘아하, 그렇구나!’ 무릎을 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배산의 형태와 마두식각배와 여인네의 하이힐이 꽤나 닮은 모습임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요. 

그렇다면 옛사람들은 왜 그렇게 술잔을 중요시하고 제사에 집착했던 것일까요? 우선 제사에 집착한 것은 추위와 더위는 물론 천둥, 벼락, 태풍과 해일 같은 풍수해는 물론 장마와 가뭄과 병충해와 흉년 같은 재해에 어떻게 배비할 수가 없고 호랑이나 늑대 같은 산짐승과 늘 남의 땅과 여자를 뺏으려는 이웃부족의 침략에 전전긍긍 잠을 이루지 못 해 그 엄청난 불안을 달래는 유일한 방법이 태양을 비롯한 자연과 용감했던 조상신에게 비는 것이었고 좀 더 격식을 갖추어 성의 있게 비는 것이 바로 제사였지요. 

공자(孔子)님이 편찬했다는 예기(禮記)에 제사의 본체는 제수(祭需)나 형식보다는 성의, 그 성의보다도 진실로 슬퍼하는 것이라 했지만 생활양식과 의식구조가 단순한 고대인들의 제물(祭物)은 아무래도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들, 목숨처럼 아끼는 양식이나 장신구, 무기를 내어놓은 것이었겠지요. 그래서 야생의 강아지풀열매(稊稗)나 피(稗), 조(粟)를 먹다 처음 벼를 접하여 소금보다도 더 하얗게 빛나는 쌀, 보석보다 더 반짝이면서 부드럽고 달콤해 조금만 먹어도 배가 든든하고 얼굴에 화색이 돌며 엔간한 질병을 이겨내는 그 신성한 곡식을 접한 고대인들은 단순히 밥을 해 먹는 것을 지나 그들이 섬기는 절대자인 신과 조상에게 바치기 시작한 것이었지요. 

하루하루 입에 풀칠도 하기 힘든 그 시절에 쌀로 떡을 하거나 술을 담는 행위는 오로지 신이나 조상을 위한, 그러니까 제사 때나 할 수 있는 엄청난 낭비였고 제사 뒤에 얻어먹는 한 잔의 술이나 한 조각의 떡은 몇 달이나 몇 년 만에 접하는 기막힌 미각과 영양의 축제(祝祭)로 그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겠지요. 

망미주공쪽에서 옛 토끼고개(兎谷)
망미주공 쪽에서 본 옛 토끼골(兎谷)

그래서 농경민족의 지명에는 그 떡을 찌는 시루, 즉 시루 증(甑)자나 술잔이 들어가는 지명이 많지요. 그러니까 연산동 고분군은 처음으로 벼를 접한 약 2천년 이전의 순하고 착한 농경민의 작은 왕국인 배산국의 왕족이 묻힌 무덤이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2. 잘미국은 왜 산속에 세워졌을까? 
 

고대사나 향토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아시겠지만 우리의 잘미국을 비롯한 인근지방의 고대국가는 동래의 거칠산국, 해운대의 장산국, 웅촌지역의 우시산국등 대체로 산(山)자가 붙어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옥한 평야나 강변을 두고 왜 그들은 굳이 그 높은 산꼭대기에 나라를 세웠을까요? 우선은 이웃한 사나운 부족들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서였겠지요. 그러나 그 이전에 고대인들이 굳이 산에서 살아야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여러분, 인구가 근 20만이 되고 시청과 구청과 9개의 동사무소가 있는 우리나라의 가장 큰 법정동인 연산동의 발상지, 그러니까 연산동 1번지가 어디인지 아시는지, 내일부터 그 연산동 1번지를 통하여 고대왕국의 성립을 지켜보기로 하겠습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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