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장남, 장손병9

에세이 제1118호(2020.10.8)

이득수 승인 2020.10.07 18:21 | 최종 수정 2020.10.07 18:41 의견 0

그 상현이가 얼마나 나아질지 저도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을지는 모르지만 그 끝없는 장남병, 장손병이 제발 이제는 그쳤으면 한다. 집안대대로 내려온 장손병, 장남병의 화근덩어리 같은 존재와 삶이 단지 그의 어머니나 할머니, 누이들에 의해 관습적으로 자연 발생한 것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우리 집안만은 그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판에 이들이 딱 둘인 내 동생의 장남이 서른이 넘도록 취업준비에 진도가 안 나가는 것도 가슴이 아프고. 게다가 코로나19로 경기가 풀릴 전망도 없고...

단 두형제만 있어도 그 맏이가 반드시 장남병, 장손병에 걸리는 우리집안의 이 슬픈 전통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이다.

그럼 무엇 하나 물려받는 것 없이 한 평생을 가족이라는 멍에를 오랜 유랑과 머슴살이와 난전의 닭장사로 살다간 우리 아버지 같은 착실하고 봉사적인 지차(之次)들의 삶은 또 어떠했는가?

천재 장남을 둔 우리아버지는 그 공부뒷바라지에 죽을 고생을 하며 차남과 네 딸을 철저히 무시했는데 말년에는 그 장남이 직장에 다녀 매일 기관지 천식약과 함께 소주 한 되씩을 마시며 오래 앓아 자식 일곱이 다 모인 날 와석종신을 한 셈이니 다소 허술하기는 하나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른 한 성실한 농부와 효자, 가장으로서의 보상을 어느 정도 받은 셈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너무 잘난 형과 별난 형수 때문에 부모재산 10원도 못 받고 고향재산을 다 팔아 멀리멀리 도망가 다시 고향 발걸음을 안 하는 장남 대신 고향마을과 집안의 길흉사를 혼자 다 감당하고 네 누님과 동생들의 중심이 되어 고향마을의 모든 길흉사를 참석하고 부조를 하면서도 맞이가 안 온다고 늘 욕을 먹고 족보편찬 등 집안행사의 형님몫까지 늘 두 몫의 비용을 떠앉아 우리누님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 나는 그 긴 세월의 보상인지 공직과 문단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는데 이 모든 것이 착하고 발고 침착한 아내의 덕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또 한 사람, 그 탈 많은 집 세째 아들로 어릴 적 삼촌인 우리아버지를 따라 같은 집에 꼴머슴을 살던 언양읍의 셋째 사촌형님 상수형님을 빼놓을 수 없다. 노모는 물론 도무지 일을 안 하는 게으른 두 형과 덜렁거리는 아우와 여동생 하나를 건사하느라 평생 고생한 그는 언양읍에서 연탄가게를 하고 건축현장의 도끼다시(백시멘트 콘크리트 바닥갈기)로 꽤 돈을 벌어 다섯 자식 다 건사하고 잘 살아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은 셈인데 하나 아쉬운 점은 형수가 치매가 와서 고생이 많다는 점이다. 

벌서 88세가 된 그 형님은 친아버지 이상으로 따르던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병풍 뒤로 들어가 아버지의 왼 발에 남은 상처(같은 집에 일하면서 다친 자리)을 쓰다듬으면 7명의 친자식보다 몇 배나 섧게 울더니 자기와 운명이 거의 같은 나를 끔찍이 챙겨 내가 우리 문중의 동창회장으로 추대했는데 참으로 열심히 봉사해 문중족보의 세보를 다시 내고 상석을 세우는 등 책임을 다했는데 자기가 제일 믿고 사는 사촌동생, 열여덟 살이나 적은 내가 혹시 먼저 죽기라도 할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참으로 고맙고도 장한 형님, 그의 백수(白壽)를 빌어본다.

평생 처음 형수가 베푼 쌀로 마련한 밥그릇. 이게 은원(恩怨)의 끝이 되어 해피엔딩이 된단 말인가?   
평생 처음 형수가 베푼 쌀로 마련한 밥그릇. 이게 은원(恩怨)의 끝이 되어 해피엔딩이 된단 말인가?   

이제 그 징그러운 가족사의 마무리가 있어야겠는데 지금 와서 우리 7남매의 가장 큰 걱정은 바로 영주에 사는 우리 형수, 한 때 버든바닥, 언양바닥, 영주바닥을 휩쓸던 여걸 이선생부인 내 형수님이다.

형님이 돌아가시고 조카가 주식투자로 진 거금의 집은 다행히 중앙선철도 확장 때 바위투성이의 집이 편입되어 한 2억, 3억 보상금이 나와 조카의 빚을 끄고 신용불량을 회복시키고 수원의 연립주택도 손보고 음성에 사는 딸(1994년 나와 거의 동시에 교통사고로 골반 뼈를 다친 장애인이지만 간호사자격을 활용 병원의 서무로 근무)도 좀 돕고(멀쩡하던 사위가 눈을 실명해 안마를 배우고 있는데 다행한 건 두 아이가 외할아버지를 닮아 공부를 엄청 잘해 탈출구는 보임) 영주에 조그만 집을 하나 사서 살고 있다. 

당시 자기 친정과 시가의 모든 사람들이 친정인 김해나 시가인 언양, 아니면 딸이 사는 음성이나 며느리가 사는 수원에 합가하라고 했지만 듣지 않고 영주에 쳐진 것은 아직도 <이선생사모님>을 추종하는 달동네 뒤새마을의 밥술도 뜨기 힘든 졸병부대를 의식해서였다.

그런데 이제 점점 여유가 없어진 형수가 이웃에게 베풀 게 없어지자 그 추종자들이 모두 끊어져 혼자 빈방에 누워 이제 자신이 죽어도 돌아오지 않겠다는 아들을 생각하고 눈물을 질금거리다 그만 풍(風)을 맞아 입이 돌아가고 말이 잘 안 되는 걸 오래 치료해 간신히 의사소통은 되는 편이다.

제사만 지내면 시가형제를 안 주고 마을 이웃을 준다고 꼭꼭 숨기던 형수의 통닭(이미지)
형수는 제사 지낸 통닭을 마을 이웃에게 준다고 시가형제에겐 꼭꼭 숨기곤 했다.

그 형수가 지난 가을 굿을 벌일 목적도 아닌 순수한 산소참배를 위해 아버지, 어머니의 산소를 방문하고 섧디섧게 울고 망향비에 새겨진 마을사람 이름 하나하나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무리 현대의학이 용하다 해도 나이 벌써 80이 가까우니 무언가 예감을 한 모양으로 돌아가자 말자 우리 두 형제에게 영주산 쌀 두 말씩을 보냈다. 월세 사는 동생에게 쌀 한가마니 주라한다고 지붕에 불을 지르고 돈 좀 빌려달란다고 온갖 횡포를 다 부리던 그 대단한 맏며느리가 마침내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나눔을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한 평생 죽도록 고생만 한 나와 동생은 그 쌀을 먹기도 안 먹기도 뭣 했지만 결국 형수를 용서하는 뜻으로 먹기로 했다. 그리고는 형수가 앞으로 건강히 지내기를 빌었다. 세상살이, 그 참으로 묘한 이치인 것이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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