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그래도 추석은 추석

에세이 제1114호(2020.10.4)

이득수 승인 2020.10.03 10:55 | 최종 수정 2020.10.05 06:30 의견 0
조손4인의 기념촬영)
2020년 추석맞이 조손 기념 촬영

멀고 더운 남쪽나라 인도에 아들을 보내고 마음이 뒤숭숭했지만 서울의 자기 외가에 머물고 있는 두 손녀와 며느리가 움직이면 혹시나 위험하지 않을까 싶어 정세균 총리의 말처럼 <총리를 팔고> 굳이 명촌집에 오지 않아도 좋고, 또 열차표를 구하기도 쉬울 것이 아니니까 올해는 카톡으로 명절인사를 대신하자고 아내가 서울의 며느리에게 신신당부했는데 착한 우리 며느리는 그걸 꼭 오라는 뜻으로 새겼는지 추석이튿날 그 귀한 STR표를 구했다고 아주 뿌듯한 어조로 전화가 왔습니다.

해마다 설, 추석 명절 두 번이면 울산의 제 아우가 집에 와서 나와 진장이라는 선산에 가서 집안조카들과 성묘를 하는데 올해는 시국도 시국인 만큼 2주 전 벌초를 하면서 추석의 모든 행사를 생략하자고 약속을 해서 참으로 조용한 추석을 맞게 되었습니다.

명촌별서에 터를 잡은 지 5년 반, 투병생활을 하는 5년 동안 명절날 점심은 의례히 울산의 동생네 식구들이 와서 같이 점심을 먹고 그런 동생을 보러 가까운 두 누님이 오시고 또명절 이튿날은 4명이 누님이 낳은 13명의 생질들이 물물이 오기 마련인데 올해 추석은 우리 부부가 만난 지 무려 46년 만에 처음으로 아내와 단둘이서 뭐 특별한 음식도 없이 나물에 밥을 비벼 아침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차를 마시는데 명절마다 오던 동생, 이미 정년퇴직을 한 예순셋의 적잖은 나이지만 그것도 시대의 흐름인지 큰 아이의 취업기회가 점점 멀어지면서 당뇨와 안구건조증 같은 성인병으로 너무나 울적할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이라도 출발해 우리 집에 와서 넷이서 나물밥을 비비고 고기를 구워 같이 점심이나 먹자고 했는데 생각해보겠다더니 끝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12시가 넘어 아마 안 오는가 보다 하고 두 내외가 점심상을 차리는데
“야야, 동생아,” 아웃에 사는 셋째누님이 자신의 유일한 언덕이자 숨구멍인 동생집(친정)을 찾아 왔습니다. (누님네는 기독교를 믿어 명절아침에 가족예배로 아침식사를 하면 곧 바로 가족이 흩어집니다.) 그 뒤로
“외삼촌!”
 50대중반의 큰 생질이 질부와 함깨 선물상자 하나를 들고 들어오는데 
“안녕하세요?”

뜻밖의 방문객 스리랑카인 디아르와 함께
뜻밖의 방문객 스리랑카인 디아르와 함께

뒤에 얼굴이 칠흑 같은 웬 흑국놈(6.25때 터키군이 진주했던 언양지방엔 터키나 필리핀인 정도로 검으면 <인도징>, 아프리카나 인도인처럼 검으면 <흑국놈>이라고 함.)이 하나 따라 들어왔는데 생질과 같은 교회의 외국인신자로 누님댁의 농사일은 물론 가끔 우리 집 밭일도 잘 도와주는 착한 스리랑카 사람입니다.

그 제서야 부지런히 튀김과 고기를 구워 상을 차리는데 
“옛다. 올해 추석 첫 번째 용돈이다.”
서랍에서 5만 원짜리 지폐한 장을 꺼내 디아론인가 하는 젊은이에게 건네주자
“제 나이가 마흔일곱 살입니다. 아이들도 여럿 있고요.”
하고 망설이는데 
“그럼 아이들 주고.”
하며 억지로 쥐여 주었는데 한국 돈 500원이면 스리랑카의 가족이 성대한 파티를 한번 할 수 있다고 기뻐했습니다. 굳이 한국과 스리랑카의 친선이나 민간외교랄 것은 없지만 주는 사람, 받는 사람이 다 흐뭇해 좋았습니다.

잔뜩 멋을 부리다 꽝을 친 소녀어부 현서
잔뜩 멋을 부렸으나 꽝을 친 소녀어부 현서

그리고 오후 네 시경 부산 신평동의 본가에 갔던 사위와 딸 외손녀가 밀어닥쳐 전 가족이 칼치 못에 낚시를 갔는데 올해는 장마가 너무 길어 마름이라는 수초(水草)가 짙어 도무지 낚시바늘이 서지 못해 단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상인과 근로자에 비닐하우스 시설농업을 하는 사람들이 다 불황이고 대추와 사과와 배와 감, 밤까지 모조리 흉작인 올 추석엔 붕어낚시마저 흉작이 되어 모처럼 멋을 부린 소녀 어부들이 그만 <꽝>을 잡고 말았습니다.

막내손녀 우화의 해피버스데이
막내손녀 우화의 해피버스데이

추석 이튿날 오후 마침내 서울에서 두 손녀와 며느리가 도착 열 명의 식구 중 아들 하나를 뺀 아홉 식구가 다 모였습니다. 올 여름에 새로 달아낸 데크에 텐트를 치고 큰 상을 펴고 마침 오늘이 생일인 막내손녀 우화의 생일 파티와 삼겹살파티도 벌이고 나니 비로소 흐뭇한 생각과 함께 가슴이 훈훈해졌습니다. 아무리 시절이 험해도 역시 명절은 명절인 것입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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