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장남, 장손병3
에세이 제1111호(2020.10.1)
이득수
승인
2020.09.30 16:47 | 최종 수정 2020.09.30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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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당연히 내 당질(5촌 조카)가 되는 장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인데 그 애는 그럭저럭 학교도 다니고 친구도 사귈 정도는 되었지만 다부지거나 독한 구석이 없이 그저 사람 좋은 표정으로 별 생각 없이 숙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성격으로 보면 집안 전통인 <손이 부드럽고 성격이 유(柔)한> 편이었지만 피부가 검고 감각이 좀 무딘 편이랄까, 아무튼 열여덟 아홉까지는 명절이나 성묘 때 장손의 자리에 서서 시키는 대로 꾸벅꾸벅 절은 잘 했는데 스무 살이 좀 넘어 다니던 회사에서 허리를 좀 다쳐 병원에 한 6개월이 있더니 그만 사람이 변해버렸습니다. 허리가 여전히 아프다고 계속 찡그리기만 하면 산재(産災)에서 치료비와 생활비가 계속 나오자 그만 일생을 산재환자로 살기로 결심하고 조그만 임대아파트를 얻어나간 것입니다.
그리고는 명절이고 성묘 때고 절대로 나타나는 일이 없었지요. 멀쩡한 장손이 사라진 상황, 집안행사를 주관하는 내가 제 4촌들을 시켜 데리고 오라고 해도 멀찍이서 제 사촌들이 보이면 슬그머니 옆길로 사라지고 임대주택으로 찾아가도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생가마을이 고속철 부지로 편입되어 수용되면서 그에게 일생일대의 찬스가 왔답니다. 문중답 800평이 제 명의로 되었으니 평당 100만원 씩 무려 8억의 거금이 그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었지요. 인근 수남마을에 시집간 좀 부족한 제 누이의 시어머니가 그걸 알고 자기 몫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지만 아예 심한 장애인으로 태어나 어릴 때 보호시설로 보낸 막내의 <가야>라는 기집애의 소재가 나타나지 않아 보상금을 수령할 방법 자체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보상금을 타 하나둘씩 이사를 갈 때 묘한 소문이 돌았지요. 굼벵이 구부는 재주가 있다더니 그 말없는 장손이 무슨 재주로 보상금을 전액 수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 제 누나의 시어머니가 자기 몫을 찾으러 가자 이미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한 푼도 없는 것을 알고 화가 나서 경찰에 고발을 해서 한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지요(사기꾼 친구의 꼬임에 빠져 서류를 위조해 보상금을 수령해 곧바로 비싼 이자를 준다는 바람에 선이자 1개월 분을 받고는 다시 돈 한 푼을 못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참으로 대단한 나라라는 것은 그런 단순무식에 게으른 사람에게도 여전히 <산재보험금>을 다달이 주어져 그가 살아가기에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한번 친구네 부친이 돌아가 문상을 갔는데 친구 막내와 친구인 우리 장손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야, 장손아!”
하고 부르는 순간 얼굴이 사색이 된 그가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그만 장례식장을 빠져나가고는 다시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제 사촌들도 여전히 만나주지를 않고...
그 힘든 시절에 집안의 대를 이어가려고 머슴살이를 해서 받은 새경으로 제답(祭畓)을 마련해 주었건만 대대로 나타나는 <얼굴이 희고 손이 부드럽고 성격이 유(柔)한> 장남과 장손들 때문에 내 아버지와 사촌형의 그 뼈아픈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런 장남의 폐단, 장손의 피해가 없는 집안이 어디 있으랴? 세계굴지의 강국이자 부국인 대한민국도 속을 들여다보면 이 가막힌 망국의 병 <장손의 병>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28세, 너무 늦게 결혼한 우리 아버지는 딸 둘을 연속으로 낳고 서른이 훨씬 지난 우리 형님을 낳았는데 또록또록한 얼굴이 희고 피부가 부드럽고 영리해 대번에 왕자대접을 받았답니다. 당시에 큰집 4형제에 딸 하나, 우리 집 딸 둘 다음에 사촌 간 합쳐 9번째로 태어났는데 두 집안 전체의 기둥인 우리 아버지의 장남에다 큰집도 삶의 모든 부분을 우리 아버지에 의존하는 형편이라 아버지를 중하게 대할 수밖에 없으니 생모인 우리 어머니를 두고라도 할머니와 큰어머니, 누나 셋이 날마다 들여다보며 형님을 귀히 여겼으니 그 자존감과 자신감도 대단했을 것입니다.
내게 남은 최초의 형님에 대한 기억은 중학교에 다니는 형의 교과서에 잉크를 엎질러 혼이 난 일 정도고 나이가 열한 살이나 많은 데다 국립체신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바람에 같이 부대낄 일도 없었습니다. 언양 바닥에서 알아주는 공부꾼 장남을 둔 아버지는 나를 처음부터 농사꾼으로 만들려는 생각이었습니다. 나도 네 살 많은 막내누님의 등 뒤로 다섯 살 때 한글을 떼었지만 여덟 살 입학식 때 아버지는 학교에 보내주지 않아 그 소식을 들은 시집간 둘째누님이 달려와 아버지와 싸움, 싸움을 해서 겨우 입학을 시켰다고 합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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