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장남병, 장손병1

에세이 제1109호(2020.9.29)

이득수 승인 2020.09.27 11:32 | 최종 수정 2020.09.28 15:33 의견 0

전에 한번 우리나라 사람들이 내세우는 <적서(嫡庶)차별>유교철학이 500년 조선왕조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백성들을 울리고 역사를 후퇴하게 했는지 이름 또는 대의명분을 주제로 살펴본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역사를 통하여 가장 비민주적, 비능률적 폐단은 지금도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새마을운동시대의 가족계획으로 대부분의 사내들이 장남들이라 차 지차(之次)로 불리는 차남이하는 딸들은 여전히 공맹시대의 불편과 슬픔을 겪고 그 수혜자인 장남들은 자신이 그 관습의 혜택만 만끽하고 짐짓 그 폐단을 모르는 척 이 시대를 개인주의, 이기주의의 온상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요즘 제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지금껏 부모를 잘 모시던 장남이 코로나와 경기부진으로 살기가 힘들어지다 단 하나밖에 없는 노모의 아파트를 담보로 융자를 받겠다고 나서자 어머니와 차남, 여동생이 반대하자 그럼 다시는 어머니를 보지 않고 제사를 지내거나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만년도 더 된 폐단인 제사를 전가(傳家)의 보도처럼 들고 나와 부모형제가 갈등을 하다 못해 원수가 지고 있습니다. 또 제가 살던 주공 아파트가 재개발로 가격이 올라가자 장남은 그걸 독식하겠다고 하고 차남이나 딸들은 결사반대하는 집이 한 두 집이 아니라 집값이 오르면서 오히려 동네의 평화가 깨저지는 사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4형제가 혹한 속에 그 꽃솜으로 낭심을 감싸 살아났다는 억새
우리 아버지 4형제가 혹한 속에 그 꽃솜으로 낭심을 감싸 살아났다는 억새

우리가 새천년을 맞고 다시 20년도 더 지난 2020년도의 대한민국은 아직도 장손과 장남이 중심이 되고 지차나 딸이 소모품이나 소품처럼 취급되는 가족사이 퇴행 내지 역주행이 횡행하고 있슨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폐단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부모, 보릿고개의 작은 아들이나 딸로 태어나 새마을공장과 중동파견, 골목시장의 장사로 평새을 모아 자수성가를 한 할머니나 할아버지마저 자신이 장남의 폐단에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이제는 도로 장남을 두둔하거나 침묵하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대한민국은 설, 추석 두 명절과 제사가 없어지지 않는 한 장남의 횡포와 차남과 딸의 눈물이 결코 종식되지 못 할 것 같습니다.

장남은 모르는 척 그 폐단을 은근히 즐기고 차남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 하는 이 불편한 진실, 내 스스로 그런 폐단의 가장 큰 피해자로서(아니 기네스 북에 오르고도 남을 정도로 기구한 장남병, 장손병에 한 평생을 보낸 사람, 평생 먹고산 직장의 난관보다도 몇 배나 더 힘든 가정적 애로사항을 격은 자로서, 나이 칠십 말기암환자로 죽음의 문턱에 서서도 여전히 앙앙불락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이 앙심, 단군 이래 가장 큰 모순과 병통인 <장남과 장손의 폐단>에 대해 이제 잔명(殘命)을 기대하기도 힘든 형편이지만 명생 동방지예의지국이라 아무로 공론화하지 않고 그 불공평과 불행에 마취가 된 사람을을 대신에 설령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한다는 심정으로 이 괴로운 <장손, 장남주의>를 조목조목 실례를, 그것도 제자신이 직접 겪고 울었던 우리 집안과 주변을 예를 들어 파헤치고자 합니다. 장신이 장남이나 장손이라 다소 거북한 분도 일단 끝까지 읽어는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극을 보면 왕세자와 그 큰 아들 세손(世孫)을 국본(國本)이라 부르며 부모인 왕과 왕비는 물론 할미인 대비(大妃)꺄지 엄청나게 떠받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단지 먼저 난 아들이 아닌 정식으로 결혼한 왕비가 낳은 적출(嫡出)이 우선이라 간혹 세자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나이 많은 군(君 왕비가 아닌 궁녀가 낳은 아들)들은, 그 선택된 아우를 하늘처럼 떠받들다 나중에 왕이 된 동생에게 역모를 의심당하거나 모략에 걸려 죽임을 당하기도 예사였습니다. 

왕실의 융성을 위해 <왕은 부끄러움이 없다>며 되도록 많은 후궁과 관계를 갖고 많은 대군과 군들을 두게 해서 나중에 적통의 세자가 왕이 되면 평온하지만 적실의 대군이 없고 후궁이 낳는 군(君)들이 여럿 경합을 하게 되면 후궁의 친정세력이 총동원된 왕위쟁탈전이 벌어지고 수많은 후궁과 군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면 적장자우선의 조선왕조는 참으로 기이한 왕조, 500년 내내 살기(殺氣)와 광기(狂氣)가 맴도는 왕국이 되고만 것이었습니다. 
 
그 한 예로 성군 세종대왕을 들면 그는 적자인 형을 죽이고 또 다른 형들을 내치며 왕이 된 태종 이방원(李芳遠)의 아들로 자기 형인 양녕대군, 효령대군 두 형들을 젖히고 왕이 된 편법을 쓰고서도 자신의 후손은 꼭 장손이 왕이 되도록 몸이 약한 문종과 단종을 위해 사육신 성삼문, 생육신 김시습 등에게 온갖 부탁을 다 했지만 역사는 그의 의지와 반대로 지차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죽이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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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서차별에는 결코 성군이라고 할 수 없는 세종대왕 [Korea.net / Korean Culture and Information Service (Photographer name) / CC BY-SA /2.0]

민간에서도 이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생기는 대로 열두 자식 마다 않고 낳아 제대로 먹여 살리기 힘든 형편에 오로지 앞으로 제사를 지내줄 장자하나를 뺀 나머지는 단지 농사짓는 노동력으로 취급되어 글을 읽는 장자와 감히 같이 자리를 할 수도 없었는데 그 호위세력의 으뜸은 침묵의 아비, 편애의 어미에 원질(原質), 즉 제사를 모시는 제꾼인 장손의 광기에 삐진 할머니가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었지요. 
 
우리집안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동학란 때 저 먼 전라도에서 파난 온 처녀와 가난한 우리 할아버지가 냉수 한 그릇 떠 놓고 결혼을 했는데 기가 막힌 건 몰락한 양반의 종손인 우리 할아버지는 제 손으로 풀 한 포기를 못뽑고 닭 한 마리를 못잡는 <얼굴이 희고 손이 부드럽고 성격이 유(柔)한> 성격이라 아들 딸 다섯을 낳는 동안 단 한 번도 손에 흙을 묻힌 일이 없이 어릴 때는 어머니의 치마폭에, 결혼해서는 아내의 치마폭에 묻혀 살았고 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못 견딜 것은 우리 아버지의 4형제 중 장남인 우리 큰아버지가 역시 체질적으로 일을 못하는, 아예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는 <얼굴이 희고 손이 부드럽고 성격이 유(柔)한> 사람으로 성격이 거칠고 단순한 둘째, 세 째 삼촌은 아무 생각 없이 머슴살이를 하고 가을에 받은 새경을 음력 설 전에 몽땅 술과 노름으로 없애 열 살도 되기 전의 우리 아버지가 남의 집 아이보기, 머슴살이를 하며 조금씩 돈을 벌어 노모와 큰형을 부양했다고 합니다. 

이득수

그래서 일찍 세상에 눈을 뜬 우리 아버지가 포항이나 감포에서 대구나 마른 생선을 사다 언양장에서 팔면 이문이 많이 남는 걸 깨치고 4형제가 지게를 지고  언양-경주 칠십리에, 경주 포항까지 또 60, 70리 100리가 넘는 길을 걸어 도부장사를 하는데 세 형이 도무지 철이 없어 우리 아버지가 물건을 떼고 팔고, 국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과 돈 관리까지 맡는 소년가장이었는데 어느 겨울에는 날씨가 너무 추워 얼어죽게 생기자 양지 바른 논둑 아래 세 형을 앉게 하고 혼자서 억새와 띠풀의 하얀 솜을 따다 세 형과 자신의 낭심을 공처럼 동그랗게 감싸서 살아났다고도 했습니다. (계속)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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