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연산동 고분군(古墳群)에는 누가 잠들었을까?③

에세이 제1122호(2020.10.12)

이득수 승인 2020.10.11 23:28 | 최종 수정 2020.10.11 23:43 의견 0

보통 토곡으로 불리는 연산8, 9동 중에서도 진짜 토곡으로 불리는 망미주공아파트가 있는 연산9동 토현에서 배산꼭대기 방향으로 연제경찰서를 지나 지금의 부산외국어고등학교 입구 쯤에 작은 우물이 있는 오목하고 포근한 골짜기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연산동 1번지였습니다.

지금은 일대가 개발되어 도무지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1970년대 동사무소에서 산불을 담당하던 제 기억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 때 토곡일대는 구획정리가 시작되고 단무지나, 사료, 페인트, 포장지, 가구공장들이 들어서고 있었지만 더러 헐려나간 산등성이와 숲 사이로 드문드문 흩어진 옛 토곡의 마을형태가 그 우물을 기점으로 나팔을 엎어놓은 모양으로 전개되어 있었으며 그 우물의 조금 아래에는 얼마 전까지 논에 물을 대던 저수지가 있어 그 저수지를 메울 때 엄청나게 많은 잉어와 붕어를 잡았다는 이야기를 중장년의 토박이에게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진1 토곡지역의 옛우물자리(1976년 개축)-두개이 봉우리중간
토곡지역의 옛 우물자리(1976년 개축)-두 개의 봉우리 중간

가끔 그 우물가에서 목을 축이고 낮은 산등성이를 넘어 지금의 경상대학 방향의 아카시아가 가득히 핀 오솔길을 휘파람을 불며 동사무소로 넘어오던 젊은이는 그 때 왜 하필이면 연산동 1번지, 그러니까 연산동의 발상지가 그 좁은 골짝이었을까 못내 궁금했는데 세월이 한참 지나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 옛 당감동 화장장이 있던 동평동 일대와 연산동으로 추정된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아, 그러고 보니 작은 샘을 중심으로 4방으로 오솔길이 이어지는 그 우물가가 참으로 사람들이 살기 좋은 요충지였구나!’감탄하고는 또 가마득히 잊어버렸죠.

그 후 오랜 근무지 연산동을 떠나 대신동 서구청에서 <서구향토지>편찬업무를 추진하면서 문득‘아하, 그렇구나! 그래서 그 작은 골짜기가 부산 또는 연산동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산 1번지였구나!’하고 또 무릎을 쳤습니다. 이제 칠순의 늙은이가 되어 세상을 좀 알게 된 저는 비로소 사람이 산다는 원리, 특히 모든 자원이 부족하고 위험요소가 많던 고대인들이 맨 처음 그곳에 살 수밖에 없었겠음을 깨달은 것이었지요. 

사람이 살아가려면 우선 먹어야 살고 그 보다도 먼저 목마름을 해결할 물을 마셔야겠지요. 처음 맹수를 피해 나무 위에서 살다 지상의 씨앗에 맛을 들여 맨 먼저 지상으로 내려와 두발로 걷기 시작한 호모 에릭투스라는 종(種)의 사람들이 제일 먼저 정착한 곳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사냥이나 고기잡이보다는 움직임이 거의 없는 조개를 잡기가 가장 쉬운 바다나 강가였지요. 그래서 우리는 고대사의 시작을 예외 없이 패총(貝塚)이라는 고대인들의 음식물쓰레기장에서 풀어가기 시작하는데 가리비가면으로 유명한 영도의 동삼동 패총, 송도바닷가의 암남동패총이 바닷가에, 또 조개띠미라는 지명을 가진 수안동의 패총도 바다에 가까운 강가의 기수(沂水)지역에 자리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도 왜 고대국가나 정치세력의 흔적은 모두 산속에서 발견되는 것일까요? 그건 바닷가나 기수지역의 강가는 사람들이 먹이활동을 하기에는 좋지만 우선 깨끗한 식수를 구하기가 어렵고 또 홍수나 태풍, 해일이 일어나면 휩쓸려 버리니 살아남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먹거리는 바닷가에서 구하더라도 잠잘 곳은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는 산중턱의 오목한 골짜기로 택하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연산동의 최초의 취락, 출발지가 동해바다와 수영강, 온천천이 멀지 않고 맑은 샘이 있는 양지바른 배산자락 토곡이 최적지였겠지요.(택리지(擇里志) 동래편에 바닷가에 가까워 어염(魚鹽)의 이(利)는 있으나 왜에 가까워 침략이 잦고 땅이 습해 장기(瘴氣)가 많다고 기록된 여러 가지 풍토병을 일으키는 이 장기를 피해 마을이 산기슭으로 옮겨간 것이라는 이야기도 되겠지요.) 

 잘미산 꼭대기를 향하는 등산로   

자, 이젠 그 아늑한 골짜기에 살던 사람들이 왜 다시 험한 산꼭대기로 옮겨가 성을 쌓게 된 것일까요? 조개무지로 불리던 패총을 남기며 바다와 가까운 곳에 드문드문 살아가던 사람들이 맑은 물이 있는 동굴이나 오목한 골짜기에 살게 되면서 점점 인구가 늘어가 가족단위가 씨족단위로 변하는 군장(群長)제도가 있어 집단전체의 사내가 모든 여자를 거느리는 군혼(群婚)으로 어린이와 노인을 비롯한 마을의 전 구성원을 먹여 살리게 되면서 차츰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 마침내 이웃마을의 식량이나 여자, 마지막엔 가까운 부족들 간에 우물과 마을전체를 탐내어 야습과 약탈을 감행하기 시작하면서 하는 수 없이 안전한 산꼭대기로 올라가 성을 쌓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 배산 꼭대기에 샘이 없으니 식수는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참, 신기한 것은 사람의 코나 손가락 끝에도 핏줄이 흐르듯이 조물주는 이 세상의 모든 지표에 생명체가 살만큼의 물을 베풀어 아무리 높은 산꼭대기에도 희한하게 샘이 있다고 하는데 배산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지금 경상전문대쪽에서 올라가는 9부능선 쯤에 파고라가 있는 작은 쉼터가 있고 그 옆에 샘물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그들의 우물이었지요. 숲에 묻혀 잊어진 것을 산불을 감시하던 사람들이 발견 동사무소에서 새마을지도자를 동원 1976년경에 새로 축조하여 안내판을 세운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관계자: 동장 김덕구, 새마을지도자협의회장 이재용, 새마을담당 이득수)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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