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연산동고분군에는 누가 잠들었을까?⑥

에세이 제1126호(2020.10.16)

이득수 승인 2020.10.16 14:34 | 최종 수정 2020.10.16 14:41 의견 0

배산성과 잘미국에 관심을 가지고 지내오던 저는 어느 날 국영방송의 역사다큐에서 고대국가의 왕들은 각각 그 국가의 규모에 따라 왕관의 격이 달랐다는 보도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즉 아직 신라가 되기 전 서라벌의 사로(斯盧)국이나 가야의 왕들은 전체가 황금으로 된 금관(金冠)을 쓰고 삼한의 소국들처럼 중간규모의 왕들은 구리가 합금된 금동(金銅)관을, 그 보다도 아주 작은 소국의 왕들은 구리에 금을 도금한 도금(鍍金)관을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잘미국왕은 도금관이었겠지요.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이웃의 거칠산국이나 장산국으로, 다시 가야로, 다시 신라로 합병되어갔겠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으리으리한 궁전과 위엄이 가득한 왕이 아니라 움집이나 동굴에 살던 아주 소박하고 친근한 청년왕을 연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5. 잘미국 여인들의 삶과 왕비의 사랑

이제 자연스레 잘미국왕비의 이야기로 들어가야겠지요. 그럼 우선 잘미국 인들의 생활모습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거의 같은 시대로 추정되는 반구대암각화를 살펴보면 수많은 고래와 어족(魚族)들 틈에 간혹 순록과 호랑이 같은 짐승의 모습이 보이며 작은 배를 타고 고래잡이를 지휘하는 추장, 풍어를 기뻐하는 아낙(추장의 아내로 추정)과 울타리에 갇힌 동물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연장선에서 생각하면 잘미국사내들도 수영강과 온천천 또 지금의 광안대교아래의 근해에서 각종 물고기는 물론 가까운 패총에서 그 뼈가 자주 발견되는 강치로 불리는 물개종류에 때로는 작은 고래도 잡기도 했지만 가까운 배산이나 황령산에서 순록이나 노루 같은 산짐승도 잡았을 것이고 암각화의 짐승우리가 보여주듯 멧돼지나 사슴을 길들이려고도 했을 겁니다.

어느 맑은 날, 망미주공에서 바라본 산 잘미산. 소년왕이 왕비를 만난 날에도 수영만에 회유하는 돌고래를 보고 사냥을 떠난 날도 잘미산 동쪽 봉우리는 저렇게 푸르렀을 것입니다.

남여의 역할이 뚜렷하던 시절이라 사내가 사냥이나 어로를 나간 시간에 여자들은 조개를 잡거나 열매나 씨앗을 모으는 채집활동에 나섰겠지요. 사냥이나 어로가 실패했을 경우도 많아 이렇게 여인네들이 주워온 조개류와 씨앗들이 사실상의 주식이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럼 여인들은 주로 무엇을 채집했을까요? 물때를 맞추어 얕은 바닷가나 강가를 뒤져 전복이나 소라, 굴 같은 조개를 잡았겠지만 귀할 때는 담치나 따개비, 거북손 같은 작은 조개나 게도 잡고 드물게 펄 속의 낙지도 잡았겠지요. 또 봄에는 찔레순과 삘기에 산딸기를 따고 여름에는 복숭아와 돌배를, 가을에는 도토리를 줍고 늦가을부터 땅이 얼기 전까지는 칡이나 마를 캐고 먹거리가 몹시 귀한 흉년에는 띠풀과 갈대의 뿌리까지 캤을 것입니다. 사냥이나 어로에 비해 하찮은 것 같으나 거의 실패가 없는 이 채집활동으로 얻는 식량이 사실상의 주식이며 그 중에서 탄수화물이 주성분인 도토리와 칡뿌리가 가장 중요한 식량이었지요.

또 여자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사냥이나 어로가 끝난 사내들이 쉬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도토리와 칡뿌리를 갈아 먹기 쉽게 만들어야했는데 그게 얼마나 힘든 중노동인지 선사시대여인들의 척추는 대부분이 몹시 닳고 비뚤어지고 키도 잘 자라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어디 그 뿐일까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로 여인네들은 반드시 아이를 낳아 길러야했으니 일단 사내를 만나 사랑을 해야 되었고 그러자면 자주 씻고 꾸며 얼굴과 몸매도 예쁘게 가꾸어야겠지요. 현대여성처럼 부드럽고 질긴 천이나 디자인이 아름다운 옷, 신데렐라는 아닐지라도 하이힐이나 운동화 같은 멋진 신발도 없고 스카프나 브로치도 없어 옷이래야 경북지방에서 갈포(葛布)라고 불리기도 하는 칡 줄기를 가늘게 찢어 그물을 짜고 가슴이나 국부만 억새꽃솜이나 띠솜(茅), 그것마저 없으면 건초나 나뭇잎으로 감추는 정도였지만 자주 씻고 얼굴이나 목덜미에 꽃물을 들이고 치렁치렁 검은 머리에 꽃을 꽂기도 하고 아주 짧고 단순한 노래로 맘에 드는 사내를 유혹해 들꽃이 가득한 언덕이나 돌배 꽃이 만발한 나무그늘, 혹은 달빛이 어스름한 바위그늘에서 사랑이 이루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큰 짐승을 잡거나 풍년이 들어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축제가 벌어진 날은 제관의 기도와 무당의 춤사위가 절정에 이를 즈음에 오랜만에 쌀밥과 떡, 술을 접한 젊은 남녀들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울렁이며 맘에 드는 상대방의 손을 잡고 제각각 나무그늘이나 잔디밭을 찾아 스스럼없이 야합(野合)하기도 했겠지만 그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근친혼의 폐단을 막아 건장한 사냥꾼에 어부와 부족을 지키는 싸움꾼이 될 사내를 낳기 위해, 그 사내보다 더 귀한 -그 사내를, 즉 파수꾼에 싸움꾼을 낳을 수 있는- 이웃마을의 처녀를 약탈하기 위해 자주 야습을 감행하여 뺏고 뺏기기를 반복했지만 당시의 아낙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이든 납치당한 마을이든 주어진 여건대로 사내를 받아들이고 아이를 낳았겠지요. 

또 어미를 중심으로 동굴 속에 모여 살며 늦은 가을에 커다란 순록이나 멧돼지, 호랑이나 물개를 잡아오는 사내를 받아들여 겨울한철을 같이 지내며 아이를 받는 모계사회에서 일부일처의 풍습이 생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의 소년왕처럼 큰 짐승을 잘 잡거나 눈빛이 깊고 휘파람이 싱싱해 여인네의 마음을 잘 사로잡는다면 몇 명의 아내와 그 몇 배가 되는 아들딸을 거느릴 수도 있었겠지요. 

이득수

그렇다면 우리의 왕과 왕비는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맺어지게 되었을까요? 앞에서 말한 우리의 왕, 부족 최고의 멋지고 힘든 사내의 아내라면 그녀 또한 매우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일 것입니다. 이목구비가 반듯한 얼굴, 회창회창 날렵한 몸매에 치렁치렁한 머릿결을 가진 뒷모습마저 고운 미인이었겠지만 특히 호소력 있는 깊은 눈빛이나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이웃부족의 처녀를 납치해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 부족 중에서 조개잡이나 도토리 따기, 마나 칡을 잘 캐고 그 위에 도토리껍질을 벗기거나 칡을 잘 갈고 칡 줄기로 옷감도 잘 짜 <칡히>나 <갈히>, <짤순이> 같은 이름을 가진 처녀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 경우에도 상당한 미인임에는 틀림이 없었겠지요. 부모의 약속으로 맺어졌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소년왕이 멧돼지의 엄니나 꿩의 깃털, 소라껍질 같은 귀한 물건으로 환심을 샀을 수도 있고 절벽의 진달래꽃을 따준 헌화가(獻花歌)처럼 바위꼭대기에 핀 붉은 동백, 노란 산수유나 하얀 돌배 꽃을 바치고 사랑을 얻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아무튼 부족전체의 축복을 받은 결혼식을 치른 왕과 왕비는 매우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머잖아 왕자나 공주가 태어날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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