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연산동 고분군(古墳群)에는 누가 잠들었을까?1

에세이 제1120호(2020.10.10)

이득수 승인 2020.10.09 12:33 | 최종 수정 2020.10.09 12:59 의견 0

오늘 저 덩그런 배(盃)산을 바라보며 옛 잘미국의 소년왕과 왕비의 애틋한 사랑을 더듬다 보니 한미한 농촌마을 연산동에서 젊음을 보내고 도시화된 연제구에서 늙어간다는 것이 이렇게 의미 깊은 일이 될 줄 몰랐다. 긴 생애에 늘 행복보다는 가난과 피곤과 쓸쓸함에 시달리며 끝없이 소외당했던 내 인생에 단지 연산동에 오래 살았다고 이렇게 황홀한 몽상의 나라에 살 수 있다니? 여기 내 노년의 마지막 재산중의 한 뭉텅이인 「연산동 고분군」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한다.

  프롤로그
  1. 잘미국 혹은 배산국의 실체는?
  2. 잘미국은 왜 산속에 세워졌을까?
  3. 잘미국의 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4. 잘미국의 영역과 인구, 왕관의 격(格)은?
  5. 잘미국 여인들의 삶과 왕비의 사랑
  6. 서럽도록 아름다운 어느 봄날
  에필로그

 

잘미산전경(배산을 잘미산이라 부르는 토곡에서 본 보습
잘미산 전경(배산을 잘미산이라 부르는 토곡에서 본 보습)

프롤로그

연산로터리에서 연일시장을 거쳐 토곡방향으로 가다보면  200m도 채 못될 것 같은 짧은 터널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이 연산터널을 통과하다가 유심히 차창 밖을 바라보면 문득 희한하게도 이 짧은 터널이 직선이 아닌 표주박형의 둥그런 호선(弧線)을 그리게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도무지 해답을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뒷거울이나 이불이라는 이름의 근방의 자연부락에서 자랐거나 이 산등성이를 타고 배산 혹은 잔뫼산(토박이들은 잘미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을 자주 올랐거나 하는 사람들은 ‘아하, 그렇구나!’ 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건 바로 터널이 통과하는 산등성에 여남은 기(基)의 크고 작은 옛무덤들이 줄을 지어 고분군(古墳群)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옛사람들이 힘들여 산기슭을 파고 돌로 쌓은 수혈식(竪穴式) 석곽을 터널공사로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설계자의 배려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고분군은 그 이름처럼 오래 된 무덤들입니다. 그 부장품으로 보아 돌로 된 칼이나 화살촉으로 짐승을 잡고 거대한 고인돌을 세우던 석기시대의 아주 오래 된 무덤은 아닐지라도 청동기나 철기시대초기의 인구나 식량이 많지 않던 시절에 늘 사나운 짐승과 엄청난 위력의 풍수해에 시달리면서 그만한 무덤을 줄줄이 지을 수 있는 세력 -그러니까 그 고분군에 잠든 사람의 무리- 그 아득한 옛날에 이 땅을 지배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자, 그러면 지금부터 우리는 그 고분중의 하나에 묻혔던 어떤 젊은 여인하나, 아직 변변한 신발도 없던 시절의 평범한 맨발의 처녀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공주나 왕비일지도 모르는 범상치 않은 여인하나와 그의 사내를 찾아 길을 떠나보기로 합시다. (단, 이 글의 목적은 역사적, 고고학적인 성과나 해답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땅을 살아가는 현세(現世), 향토(鄕土) 시인의 시각으로 옛길을 더듬는 인간적, 감성적인 스토리텔링을 펼쳐 보이는 것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사진1 배산전경(물망골이나 양정쪽에서 본 모습)
양정 쪽에서 본 배산 

1. 잘미국 혹은 배산국의 실체는?

동래부지를 비롯한 다수의 기록과 원주민들에게서 아득한 옛날 배산꼭대기에는 배산국이란 작은 나라가 있어 8부 능선쯤에 돌로 쌓은 석성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실제로 부산에 오자말자 연산동에 정착, 한 번도 떠나지 않고 50년 너머 살아온 필자는 지금 경상대학교에서 혜원정사의 뒷면에 해당되는 산기슭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석성으로 추정되는 돌무더기를 늘 보아오고 또 직접 오르지 않더라도 날이 맑은 겨울이나 초봄에 온천천방향에서 눈여겨보면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게 반짝이는 실 반지처럼 가느다란 석성의 흔적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고분군의 이야기가 배산과 배산국으로 옮겨왔을까요? 그건 당시에 그렇게 거대한 무덤을 쌓을 수 있는 세력이라면 고분군과 가장 가까운 정치집단으로 추정되는 배산국을 지목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럼 우리는 우선 배산국의 이름이 된 잘미산, 혹은 배산으로 불리는 산 이름을 먼저 살펴봐야겠지요. 우선 글자만 가지고 보면 잘미국은 <잔>과 <뫼>에서 그러니까 잔뫼에서 온 잔(盞)처럼 생긴 산이요, 배산(盃山) 역시 잔배(盃)자이니 같은 의미라 할 것입니다.

<시인·소설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