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통영(統營) 신사 이승암, 그 단아한 삶과 죽음3

에세이 제1105호(2020.9.25)

이득수 승인 2020.09.24 17:26 | 최종 수정 2020.09.24 17:41 의견 0
사진1.천마산 학생조각공원에서의 점심식자. 정면에 고개를 피자가 보이고 그 왼편에 고개를 숙인 사람이 이승암 국장이다.
천마산 학생조각공원에서의 점심식사. 얼굴이 보이는 뒷줄 가운데가 필자, 그 왼쪽 고개를 숙인 사람이 이승암 국장.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왕조시대, 특히 나라가 위기에 처한 시절의 사내들은 비록 가난하고 고달프고 쉽사리 목숨을 바쳐야하긴 했지만 무언가 삶의 가치를 부여할 만한 대의명분(大義名分)과 기회가 있었지만 전쟁이 없어진 지가 반세기가 넘는 지금 같은 평화시대, 경제가 세상을 지배하고 충절을 지켜 목숨을 바치기보다 눈치가 빠르고 사람을 잘 다루는 사람이 지배자가 되는 시대에는 한 사내가 감히 목숨을 버릴 만큼의 대단한 명분도 기회도 없는 것이다. 

호랑이가 죽어 가죽을 남긴다는 말처럼 입신양명(立身揚名), 이름을 남기기 원한다면 요즘 세상만큼 사내들이 살아갈 명분이 없고 무언가 이루고 남기기 어려운 시대도 없다. 그러면서 남녀평등이 양성평등으로 다시 레이디퍼스트의 페미니즘으로 변해 더욱 입지가 좁아지면서 자칫하면 마마보이나 공처가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그래도 굳이 이 시대 남자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좀 더 가까이 찬찬히 살펴본다면 앞의 이승암 국장은 우리 시대의 한 모범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역할을 다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렇다면 나도 죽고 이 글을 읽는 이들도 모두 죽을 것이다.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죽기 전의 아픔, 죽는다는 공포도 보통이 아닐 것이다. 아아, 기독교의 장례식에서 말하는 요단강을 건너가 만나는, 아니 그 아득히 멀고 어두운 죽음의 강을 우리는 어떻게 건너야 하는 것일까? 
 
논산훈련소에서 처음 정신없이 힘든 훈련과 낯선 환경에 직면했을 때 나는 내 사촌형님을 비롯한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도 이미 그 어렵고 힘들고 지루한 군대생활을 마친 사람이라면 다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3년간의 휴지(休止)상태인 군대가 그럴진대 하물며 그 끝없는 어둠과 공포의 나락, 죽음의 강을 먼저 건너간 선배에 대한 외경심이란!
 
이제 주변사람이 적잖이 죽음의 나라로 떠나는 이 나이에 나 역시 윤동주의 서시(序詩)에 나오는 시구(詩句)처럼 모든 죽어간 사람과 그 꿈, 농부의 논밭, 졸부의 빌딩, 상인의 요지(要地), 학자의 지식, 발명가의 미완성 아이디어, 무명시인의 넋두리, 늙은 예술가의 권위처럼 이승의 그 많은 재산과 미련을 버리고 훌훌히 떠난 사람, 아무 미련도 없이 온전히 생애를 불태우고 소금보다도 더 희고 정갈한 영혼으로 결정(結晶)된 사람, 그 불안과 공포가 칙칙하게 도사린 죽음이라는 어두운 다리를 건너 마침내 혼란의 이승(此岸)을 넘어 영원한 빛의 세계(彼岸)에 도달한 영혼들이 부럽고 존경스러운 것이다.

사진2. 가정용 노래방 마이크. 그는 술을 못 마시는 대신 회식이 끝나면 노래방에 가기를 유독 좋아했는데 노래점수는 백전백승 그의 승리였다.(191125)
가정용 노래방 마이크. 그는 술을 못 마시는 대신 회식이 끝나면 노래방에 가기를 유독 좋아했는데 노래점수는 백전백승 그의 승리였다.

그렇다면 내게 다가올 죽음은 어떤 빛깔일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라면 어떤 미련이나 두려움도 없는 담담함을 넘어 차라리 흥겨운 축제처럼 붕붕 뜨는 느낌, 꺼지기 직전에 펄럭이는 촛불처럼 화려한 불꽃이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차피 죽음을 전제로 생명이 태어난 것이라면 살아가는 동안의 어떠한 영광도 결국은 죽음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오페라의 대미처럼 화려하고 장엄한 죽음을 완성하는 피날레의  장식일 뿐이다. 

죽음, 그 육신이 참담하게 무너지는 생명의 종말에 있어 우리는 생애 내내 후줄근히 젖은 추레한 육신의 옷을 벗고 찬란한 영혼의 날개로 비상(飛翔)하는 과정이면 좋으련만 과연 영혼이 있기나 한 것인지, 그런 천상의 세계인 저승을 다녀온 자, 그러니까 아직까지 죽었다 살아난 자가 없으니 그마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누구도 살아서는 알 수 없는 죽음,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필연의 미래, 죽음에 대하여 처연하게 슬퍼하며 공포(恐怖)에 빠지기보다는 또 하나의 탄생, 새로운 세상의 개벽(開闢)에 대하여 차라리 황홀하고 사치스런 기대에 부풀면 어떨까? 

그렇다면 우리의 육신이 해체(解體)되는 순간, 비로소 먹고 숨 쉬고 피돌기를 지탱하는 생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의 영역에 진입하는 영혼이야말로 불꽃처럼 타오르는 죽음의 호사를 누릴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 호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될까? 

어머니의 품, 고향마을과 유년의 추억, 첫사랑과 첫아이의 대면일 수도 있고 사법고시 합격이나 국회의원 당선, 로또복권 당첨의 또 다른 무엇일 수도 있으며 어린 시절에 보았던 무지개, 여울에 부서지던 햇살, 흩날리던 찔레꽃과 그렇게 가슴이 콩닥거리던 첫 경험의 살 냄새와 전율(戰慄)일 수도 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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